<바다의 뚜껑>의 한장면

<바다의 뚜껑>의 한장면 ⓒ 안다미로


도시 생활에 지친 마리(키쿠치 아키코 분)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해안가 고향 마을에 내려온다. 그는 바닷가의 작은 창고를 개조해 빙수 가게를 열어 새 삶을 시작하고, 마리 엄마와의 인연으로 마을을 찾아온 하지메(미네 아즈사 분) 또한 마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가까워지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두 사람. 이들은 서로가 지닌 깊은 슬픔을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으며 조금씩 빛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 <바다의 뚜껑>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일본 특유의 '슬로우 무비'다. 특별한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이 사소한 일상의 결들을 내내 잔잔하게 그린다. 오랜 시간을 들여 마리와 하지메를 멀찍이서 응시하는 카메라, 그리고 평화로운 섬마을의 고요한 분위기를 부각하는 절제된 음악까지. 소박하고 고즈넉하다 못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 덕분에 편안한 '힐링'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바다의 뚜껑>의 한장면

<바다의 뚜껑>의 한장면 ⓒ 안다미로


무대미술 일을 하던 마리,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던 하지메. 이들에게 있어 빙수 가게와 바닷가 생활은 각자에게 소중했던 존재를 잃은(또는 버린) 뒤 갖는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팔겠다'며 당밀(사탕수수)과 귤 두가지 맛 빙수만 파는 마리에게 있어 가게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터'가 아니다. "바다에 들어가는 건 무섭지만 보는 건 좋아한다"는 하지메는 "조금씩 익숙해지면 언젠간 들어갈 수 있을까"라며 조금씩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낯선 길을 걷는 둘의 걸음은 더디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이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바닷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속 일상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안식처다. 한낮과 밤, 이른 새벽 등 시간대 별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해변가는 맑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 덕분에 오히려 더 운치가 있다. 여기에 바닷가와 접한 산, 도심 거리를 오가며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일상은 전원 생활이 지닌 평화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바다의 뚜껑>의 한장면

<바다의 뚜껑>의 한장면 ⓒ 안다미로


마리와 하지메가 각각 홀로 서기 위해 겪는 과거와의 고군분투는 이 고요한 영화 속 거의 유일한 갈등 요소다. 과거의 관계에 미련을 가진 두 사람이 현재까지 상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설정은 대부분 빈 칸으로 남겨진 덕분에 오히려 생명력을 얻는다. 마리에게는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 오사무와의 재회, 하지메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두고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떠난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각자에게 소중했던 사람, 하지만 상대방에겐 제3자인 이에 대해 두 여자가 나누는 지극히 주관적인 대화는 마치 잘 쓰여진 에세이처럼 아련하다.

영화의 주된 로케이션인 마리의 아담한 빙수 가게는 소박하면서도 예쁜 인테리어로 인상깊게 남는다. 얼음과 시럽 두가지 재료로만 만드는 일본 특유의 빙수 카키코오리(잘게 깬 얼음이란 뜻)는 우리나라에선 다소 낯선 모습이어서 호기심을 돋운다. 사탕수수와 귤 등 원재료를 끓여 직접 만든 하얗고 노란 수제 시럽, 네모난 얼음을 커다란 수동 제빙기로 깎아 만든 다소 거친 질감의 얼음가루까지. 이를 통해 군더더기 없이 완성되는 빙수는 두 주인공과 더불어 <바다의 뚜껑> 속 시큼 달큼한 맛을 내는 오브제로서 손색이 없다. 지난 9월 29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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