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이 사회에는 두 종류의 시선이 존재한다. ⓒ (주)엣나인필름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안함은 이야기하지 않냐고. 인간의 생명이 평등하고 죽음도 그러하다면, 왜 똑같이 물에서 죽었지만 왜 하나의 죽음은 잊지 말자고 하면서 다른 죽음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물론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했지만, 그와 같은 빈도로 천안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답했다. 당신의 말처럼 두 죽음이 동등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냐고. 한 죽음은 매년 기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며 사회 전체의 책임이 되지만, 한 죽음은 이제는 잊고 지나가야 하며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두 죽음을 똑같이 말하는 것이 과연 평등하냐고.

나의 대답처럼 모든 죽음은 평등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어떤 죽음이 사회적 책임이나 진실을 드러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오점을 덮기 위해, 혹은 당면한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 죽음을 회피하고자 한다. 어떤 맥락에서 보나 세월호는 단기간에 애도가 가능한 무게의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애도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는 잊자고 말하는 것은 그냥 그 죽음들을 덮어버리자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혹은 그 사건이 드러낸 진실을 날조해버리는 것이다.(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고) 두 부류의 사람들, 지금의 사회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겨져야만 안전한 사람들과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이 이를 요구한다.

장례식이 되어버린 삶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시선은 탁월하다. ⓒ (주)엣나인필름


이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 영화가 바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침묵의 시선>이다. 감독의 전작인 <액트 오브 킬링>이 학살자에게 집중했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학살 당한 이들의 가족들을 카메라로 비춘다. 영화는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군부 정권의 대학살을 다룬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학살의 책임자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고 유가족들은 책임을 묻기는커녕 그 죽음에 대해서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아이들은 학교에서 죽은 이들이 잔혹한 사람들이었으며, 때문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그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거짓 된 역사를 배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애도는 사회적 과정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군가 죽으면 장례식을 열고, 고인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 동참해 그 사람이 떠나감을 확인하고 수용한다. 이렇게 그 사람의 죽음은 승인되고 유족들에게도 상실은 명확한 것이 된다. 그렇게 애도는 시작하고 또 완료된다. 특히 어떤 이의 죽음이 더 큰 사회적 의미를 지닐 때, 그 상실을 확인하고 수용해야 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넓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 죽음을 말할 수도,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야기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애도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우리는 상실에 대해 계속 말해야만 한다. ⓒ (주)엣나인필름


<침묵의 시선>에 등장하는 유가족들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 무려 100만 명이 죽은 사건이지만 사회는 학살을 제대로 기억하기는커녕 그 죽음들을 날조해버렸다. 학살을 이끌고 가담한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가족들은 이들이 두려워 그 죽음을 말조차 하지 못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학살로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녀는 지금도 자신의 아들이 꿈에 등장한다며, 여전히 그가 그립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차피 학살자들은 저승에서 신에게 벌을 받을 테니, 괜히 지금 문제를 키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상실을 사회적으로 승인 받지 못한 사람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을 끌어안고 사는 일이나, 그 죽음을 말하지 않고 묻어두는 일이나 망자를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점에선 같다. 이들에게 그것 외에 무슨 선택이 있겠는가.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이 같은 탁월한 문장으로 묘사한 바 있다.

"당신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회피되는 책임

영화에서 학살로 자신의 형 '람리'를 잃은 '아디'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바로 그 당시에 학살을 저지른, 형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들이 한 일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이 무고한 사람을 학살했다며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학살자들은 이를 인정하기는커녕 후회조차 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그리고 되려 아디에게 왜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어 혼란을 부르냐고 타박을 한다. 영화 속 모든 가해자들이 비슷한 말을 던진다. 왜 이미 아문 상처를 헤집느냐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아문 상처가 헤집어져서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다. 단 한번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치유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이들은 학살을 통해 생채기조차 입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 군부의 인정을 받고 그 만큼의 권력을 챙겼다. 학살 당한 사람의 재산을 탈취해 부를 누렸다. 학살자들은 그들이 정한 방식대로 죽음이 완료되지 않고, 유가족들이 지닌 진실을 마주했을 때만 자신들이 말한 상처를 입는다. 그 진실이 그들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가족들이 애도에 나서는 과정은 가해자들의 이해와 배치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비슷하다. 세월호 사건의 책임이 정부에 있는 것이 되고, 백남기씨를 죽인 것이 공권력이 되는 순간 국가가 지닌 힘도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잊혀져야 하고, 유족이 원치 않는 부검을 감행해서라도 죽음의 원인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고,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을 때 애도는 요원한 것이 된다.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것이다.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 이를 위해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장례식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

우리는 제대로 된 애도를 요구한다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장례식은 계속된다. 우리의 삶이 장례식이다. 상처가 아물지 않으니까. ⓒ (주)엣나인필름


영화 속에서 학살자들은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그들은 사람을 죽인 뒤 그들의 피를 마시곤 했는데, 그것이 미치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들의 행동이 식인 행위처럼 느껴졌다. 죽은 자들을 먹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 죽음을 자신의 몸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말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질 것에 대한 공포, 그리하여 자신의 책임을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는 무서움을 그렇게 덮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정부가 나에겐 그렇게 느껴진다. 죽음조차 모두 집어 삼켜 사람들로 유폐 시키려는 괴물처럼 말이다.

언젠가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을 놓고 그랬던 것처럼, 백남기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제는 상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고 떠나간 사람들을 보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바라는 바다. 유족들의 고통이 덜어지길 간절히 빈다. 하지만 그 일은 애도를 제대로 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죽음이 정확하게 이야기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의무를 다 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유족들의 그리고 우리들의 상실을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애도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침묵의 시선 백남기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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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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