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 KBS


드라마는 오케스트라다. 협의의 예술이다. 현장 스태프와 작가, 연출과 배우의 합이 맞아야 하나의 결과물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를 하나의 화음으로 구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드라마의 화음이 깨지면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올 확률이 자연히 낮아진다. 그 중에서도 작가와 총연출은 시작과 끝을 맡는다. 작가가 악보를 쓰는 작곡가라면 총연출은 지휘자다.

2016년 KBS <드라마스페셜>의 문을 연 드라마 '빨간선생님'은 극본 공모 당선작으로 처음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내놓은 권혜지 작가와 2007년 드라마 피디로 입사한 유종선 피디가 만나 합을 맞춘 작품이다. '빨간선생님'은 금서의 시대, 야한 소설을 쓰는 여자 고등학생에 일어나는 일을 다뤘다. 이 '빨간선생님'팀이 만들어낸 화음의 '태초'가 궁금해 이들에게 만남을 청했다.

지난 28일 KBS 신관 근처에서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의 연출을 맡은 유종선 피디와 권혜지 작가를 만나 '빨간선생님'의 후일담과 제작 배경을 들었다. '드라마가 방송되고 주변 반응이 좀 있느냐'는 질문에 권혜지 작가는 "시청률(2.4%)은 잘 안 나왔다"라면서도 밝게 웃으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봐주신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유종선 피디 역시 "단막극이라는 포맷에 비해서 반응이 정말 많이 나온 편이라고 본다"고 소감을 말했다.

단막극

- 시대를 1980년대 배경을 경상도 어느 여고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권혜지 작가(아래 '권') "처음부터 여고생이 야설을 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냥 야설만 쓰면 아무런 긴장감이 없겠더라. 그래서 80년대를 들고 왔다. 시나리오를 배우는 학원에서 '빨간선생님' 초고를 평가 받았는데 처음에는 100점 만점에 4점을 받았다. (웃음) 상업성이 없으니 이거 말고 다른 걸 쓰라고 해 잠시 두었다. 그러다가 공모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초안을 잡았다. 야설을 금서로 바꾸면 어떻게 될 것 같더라.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빨간선생님' 속에서 글을 쓰는 순덕의 모습 ⓒ KBS


그런데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라 오해를 하며 글을 쓰게 될까봐 우려가 됐다. 일주일동안 도서관을 왔다갔다하면서 자료조사를 했고 '빨간선생님'이 나왔다. 처음에 엄마가 그러더라. 어떻게 네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대의 이야기를 쓰냐고.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았다면 이런 이야기를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살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력을 넣을 수 있었고 겁 없이 쓸 수 있었다."

- 예산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80년대 배경과 소품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유종선 피디(아래 '유') "만들어진 오픈 세트는 1970년대 이하부터 있고 1980년대는 사실상 다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더라. 그래서 수원, 안양, 파주, 충청도 괴산의 폐교(학교 내부), 칠성(학교 외부)을 오갔다. 사실 제일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제작비 대비 과잉노동을 스태프와 배우에게 요청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단막은 제작비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한 세계를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장편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장편을 할 때 해당 시간에 벌 수 있는 돈보다 적은 돈을 받으며 일을 해야 했다. 독립영화나 학부생들 작품 만드는 느낌의 헌신을 어느 정도 요청해야 하는데, 다들 직업인들이지 않나.

예산 문제로 일주일 이내에 작품을 찍어야 했다. 24시간, 심지어 30시간 찍은 날도 있었다. 보통 7일로 계약을 할 때 24시간 넘겨서 찍는 걸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대본과 스케줄 표를 보면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건데, 적정 시간의 노동만으로는 분량 소화 자체를 하지 못한다. 다들 죽어났다. 노력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단막은 상업성이 없어 예산 배당이 많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청자의 눈높이를 맞추기 쉽지 않다. 게다가, 배우나 스태프 입장에서 돈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퀄리티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굳이 작품에 참여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모두에게 늘 헌신을 요청하게 된다. 퀄리티가 높은 단막이 있으니 <드라마스페셜>을 정규 편성하자는 기사, 저도 너무 감사하고 내부에서도 그런 기사를 고마워 할 것이다. 하지만 '고퀄리티 단막'은 늘 이런 '예산 대비 높은 노동 강도'로 만들어지기에, 상수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아이즈>의 위근우 기자도 언급했듯이 오히려 퀄리티 측면에서는 어설프더라도, 신선한 소재와 시각, 아이디어 같은 부분들이 더 주목 받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시청자들을 위해 드라마 판에 새로운 물길이 트이는, 단막의 존재 이유가 될 것이다."

"정말 이게 몇 명의 영혼을 갈아 넣은 건지 싶더라. 스태프들의 노고를 내가 잘 몰랐구나 싶었다. 정말 영상만 봐도 고생한 게 느껴졌다."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유종선 피디가 특히 신경써서 구했다는 큰 나무. 고등학생들이 놀던 집은 드라마를 위해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 KBS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집의 내부. ⓒ KBS


- 유종선 피디는 사실 단막극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액자가 된 소녀' 2015년 '머리 심는 날' 2016년 '빨간 선생님'까지 꾸준히 단막을 해오고 있다. 이유가 있나.

"단막을 되게 좋아한다. 단막이 돌아갈 때 KBS 드라마국이 가장 생기가 넘친다. 생글생글하다. 서로 대본에 대한 의견도 주고받고 이제 데뷔하는 연출들의 설렘이나 인턴작가 합평회를 준비하는 분위기. 드라마의 재미와 설렘이 단막극을 제작할 때 살아있는 것 같다. 장편 드라마의 경우 상업판이지 않나. 누구를 캐스팅 하고 반드시 성공을 해야 하고 마치 거대한 사업을 굴리는 느낌이라면 단막이 돌아갈 때는 그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올해도 단막이 시작하니 다들 들 떠 서로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선배들도 단막을 하는 순간의 선배들이 가장 멋지고 닮고 싶다. 단막을 할 때 에너지와 고민은 연출자로서 평생을 가져가는 재산이 아닐까 싶다."

장면들

- 글을 쓰면서 특별히 공을 들인 신이나 연출하면서 신경을 쓴 지점이 있을까.

"사실 마지막 장면을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선생님"이라 부르는 장면은 반쯤 쓰다 보니 저절로 떠오르게 됐다. 그 장면이 떠올랐을 때 '이거 뭔가 될 것 같다' 싶었다. 그 장면을 쓰면서 약간 눈물도 났던 것 같다. 주변 지인들이 자꾸 그 다음에 둘이 어떻게 됐는지를 물어본다. '빨간 선생님' 2부를 써달라고. (웃음)

"연도를 확실하게 정해두고 가자 싶었다. 1985년으로 설정한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원작에서는 82년) 실제로 85년에 금서 단속을 강하게 추진해 역사적으로도 당시 고초를 겪은 사람이 많았고. 거기에 순덕(정소민 분)이 1987년에는 대학교 1학년이 되더라. 사실 태남(이동휘 분)은 끝까지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순덕에게 '나중에 세상을 바꾸라'고 '세상이 변하면 그때 글을 써도 늦지 않다'고 말을 하지 않나.

순덕이는 그 당부를 따르지 않는다. 내가 순덕이라면 대학생이 돼 어떻게 행동했을까? 태남이 고마웠다고 태남의 유지를 따랐을까? 자신이 선 자리에서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보통 사람이 '세상을 바꾸다 만 경험'이 4.19 혁명과 6월항쟁 이렇게 두 번 있다. 그 한복판에 순덕이 있으면 했다. 두 사람은 결국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이해했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 전두환의 초상이 나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태남(이동휘 분)의 뒤편에 전두환의 초상화가 보인다. ⓒ KBS


"사실 대통령 사진이 극 중에서 주요 소재로 쓰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있어야 했다. 글로 봤을 때는 무명의 대통령이라 말할 수 있지만 영상이니까. 처음에는 아예 모르는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가상으로 가야하나? 싶었는데 드라마가 가야할 길이 아닌 것 같더라. 우려가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떤 시대를 특정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워낙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동안 많이 쓰여 왔기 때문에 부담이 덜했다.

난 2007년 1월에 KBS에 입사했다. 2007년이면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이 되는 해다. '빨간 선생님'을 위한 영상자료를 조사하다보니, 입사한 해의 <KBS스페셜>, <시사투나잇> 등, 6월 항쟁 20주년 관련 방송들을 찾아보게 됐다. 미완의 혁명,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 역사의 발전, 사람들의 숭고한 선택과 희생. 그리고 현재에 와서 이것들의 의미와 과제….

당시로서는 지상파에서 담론을 거론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10년 전이었다면 '빨간선생님'이라는 대본이 별 의미가 없다 판단했을 것 같다. 많이 본 추억담이라고. 하지만 지금 시점에 너무 의미가 있는 거다. 사실 극은 최우선으로 재밌어야 하고, 누구에게든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하면서 과잉된 표현이 없는지를 계속 점검했다. 6월 항쟁을 묘사할 때 정치적 구호는 다 빼고 실제했던 사실에 대한 묘사만 느껴지길 바랐다. 그래서 순덕이 87년 배경에서 쓰고 있는 문구도 '최루탄을 쏘지 말라'다. 실제로 당시에 많이 사용됐던 현수막 중 하나다. 공권력이 최루탄으로 시민을 죽였으니, 굉장히 상식적인 문구 아닌가.

그런데 '빨간선생님' 방송 당일 날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다. 30년 전에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을 맞고 죽어 제발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호소했고, 시대극으로써 난 묘사를 했는데, 30년 후에 이번엔 공권력이 쏜 물대포를 맞고 사람이 죽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문구도 원래 빼려 했다. 감상을 저해하는 요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오히려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분명 존재했던 역사의 일부 아닌가. 간혹 웹상에서 KBS에서 이런 내용이 방송되는 것이 이상하다는 반응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내용상의 제약을 받은 적이 없다. 공영방송에서 충분히 방송할 수 있고, 또 방송하는 데 제약이 없어야 하는 내용이 아닐까. 우려해주신 시청자분들에게 감사한다. 우려에 비해 건강한 (웃음) 제작 과정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담당 팀장부터 심의위원까지, 감사한 분들이 많은 프로그램이다."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그 시대를 불러오는 방식에 대하여. 사진은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 KBS


배우들

- 80년대, 그리고 이동휘라는 배우까지. 어쩔 수 없이 <응답하라 1988>이랑 비교가 된다.

"맞다. <응답하라 1988> 때문에 캐스팅을 망설였다고 말씀드려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궁금하더라. 당선작에는 태남이 키가 되게 작고 대머리에 뚱뚱하다고 묘사돼있다. 원작을 읽고 떠오른 배우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잭 블랙. (웃음) 한국에서 떠오른 0순위 배우는 이동휘였다. 이동휘 배우는 그간 좋은 친구나 동료로서 역할을 주로 맡아왔는데 그런 캐릭터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때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더라. 사실 '좋은 친구'라는 배역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굉장히 한결 같고 남들을 챙겨주고 그러면서 욕망의 주체로서 역할하지 않는다. <응팔>의 동룡이도 마찬가지다. 그런 친구가 이 세계로 들어와 욕망의 주체로 얼굴을 드러내면 어떨까 싶었다."

- 사실 태남은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다. 정의로운 선택을 하지만 삶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나는 드라마 속에는 캐릭터의 성장이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 누군가를 도와주는 행동을 하지 않을 법한 사람이 '야설'이라는 소재로 인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은 지점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관계 없이 사람 내면에는 자기가 모르는 면이 있다는 것도."

- 또 정소민 배우는 '빨간선생님'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2016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자료 사진

'빨간선생님'에서 순덕 역할을 맡은 배우 정소민. ⓒ KBS


"사실 단막극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사실이 큰 결심이긴 하지만 그 지점에 포커스가 맞춰진 건 다소 아쉽다. 정소민은 무척 그릇이 큰 배우다. 머리카락을 자른 결정은 그 배우가 가진 용기 중 빙산의 일각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30시간 밤을 새고 오열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사실 감정신은 진이 빠지면 제대로 찍지 못한다. 잠깐 눈이라도 감고 있으라고 아침에 촬영을 할 텐데 페이스를 조절하라고 말해두었다. 그런데 소민이 새벽에 오더니 나더러 자기가 감정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아빠!'라고 외치라고 해달라"라고 부탁하더라. 해 뜰 무렵 그 신을 찍었고 좀처럼 첫 테이크에 감정이 나오지 않았다.

소민이 크게 "아빠! 아빠!" 선창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진짜가 나온 거다. 대본에 없던 대사까지 나왔다. 연출자로서 10년간 드라마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드라마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방금 말씀하신 장면에서 나는 정작 대본을 쓰면서 감정이 올라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며 내가 쓴 대사가 아니었는데 싶으면서도 눈물이 나더라. 저게 진짜구나. 나도 몰랐던 진짜 순덕의 모습을 정소민 배우가 표현하고 있구나 싶었다."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 유종선 피디 권혜지 작가 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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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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