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수라> 포스터

영화 <아수라>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악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지상정이라는 말로 인간의 속성을 표현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충격적 사건에 의해 무장해제 될 때가 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항변은 이미 벌어진 사건 앞에서 무력하다. 처참하게 희생된 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아직 살아있는 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타인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는 이들을 우리는 '악인'이라 부른다. 이들을 담은 숱한 콘텐츠가 존재했다. 영화도 그중 하나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악의 모습을 보며 우린 얼마나 두려움에 떨면서도 환호했던가. <양들의 침묵> <쏘우> 시리즈 같은 공포물과 각종 히어로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 등에서 그린 악인 혹은 절대 악은 곧 이 세상의 일부를 은유하는 훌륭한 텍스트였다.

영화적 소품이었던 악인

어디 할리우드뿐일까. 우리도 이런 텍스트를 갖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살인의 추억>(2003)이라든가 한국형 스릴러 장르 흥행의 포문을 연 <추격자>(2008), <악마를 보았다>(2010) 등을 당장 떠올릴 수 있다. 일종의 '악인 계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꽤 풍부한 작품들이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

주제의식은 달랐지만 각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부류의 현대적 악인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이런 악인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 일종의 소품으로 작용했다. 그 예가 <살인의 추억>이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으로 지목되는 박현규(박해일 분)의 진범 여부는 영화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물론 관객들은 이리저리 피해 가는 박현규의 모습에서 일종의 분노를 느꼈을 테다. 하지만 연출을 맡았던 봉준호 감독은 달랐다. 범인을 지목하는 대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을 넣거나 우왕좌왕하는 경찰들, 대규모 국가 행사에 동원되는 군중 신을 넣음으로써 당시 사회상을 은유하는 데 집중했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게 아닌 개인이 국가에 의해 동원되는 이미지를 넣고 싶었다"며 "당시 사회나 국가는 (살인범의 희생자가 된) 시골 여자를 보호할 능력도 의도도 없었다"고 인터뷰 한 봉 감독의 말을 참고하자.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화면 상단 벽에 전두환 사진이 걸려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화면 상단 벽에 전두환 사진이 걸려있다. ⓒ 싸이더스Fnh


<추격자> 속 악인 지영민(하정우 분)에게도 얼핏 박현규의 모습이 보인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살인마 같지 않은 순진한 외형의 사이코패스다. 오히려 영화는 약한 여성을 물건처럼 다루며 안마시술소로 돈을 버는 전직 형사 엄중호(김윤석 분)를 대비시키며 선과 악의 모호함을 끝까지 밀고 간다. 여기에 노인과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지영민의 이미지가 덧대지며 진짜 악의 속성에 대한 물음을 관객에게 던졌다.

나홍진 감독은 올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서 <추격자>에 대해 "범인을 빨리 명쾌하게 잡으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며 "그걸 통해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악인의 진화

그리고 여기 두 작품이 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와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2016)다. 둘 다 악의 속성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그걸 감각적으로 잔혹하게 담아내며 일종의 '고어영화'(gore film) 성격을 품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선혈이 낭자하고 살점이 튀는 묘사를 주저하지 않는 두 작품에서 악인은 영화적 소품을 넘어 영화 그 자체로 작용한다. 중요한 축 정도가 아니라 악인 자체가 주인공이 된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를 보자. 여성을 연쇄적으로 살인하며 변태적 욕망을 충족하는 장경철(최민식 분)과 그에게 약혼녀를 잃은 형사 김수현(이병헌 분)의 맞대결에 집중한 작품이다.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자와 그에게 어떻게든 고통을 주며 복수하고 싶은 자와의 싸움인 셈이다.

죄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 경철이야 그렇다 치자. 영화 속에서 김수현의 변화가 인상적인데 복수를 위해 경철과 같은 방식으로 신체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곧 경찰이라는 신분만 지우면 누가 악인이고 누가 정의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다. <추격자>의 엄중호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짐승 잡는다고 짐승이 되면 되겠수?"라는 <악마를 보았다> 속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영화는 선과 악의 모호함을 넘어 그것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 영화사 비단길


<아수라>는 제목 그대로다. 중생들이 서로 싸우는 지옥 같은 세상을 배경으로 영화는 절대 악인과 그들과 손잡은 또 다른 악인을 묘사한다. 말 그대로 악인들의 집단 대결이다. 가상 도시인 안남시를 이끄는 박성배 시장(황정민 분)은 조폭과 각종 비리에 연루된 인물이다. 재개발을 놓고 시민단체와 대립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박성배 시장 밑엔 전직 경찰 한도경(정우성 분)이 있다. 살인과 폭행을 서슴지 않으며 각종 더러운 일을 일삼는 일종의 해결사인 셈인데 박 시장을 고꾸라뜨리려는 검찰 조직이 그를 역이용하면서 영화는 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검찰의 방법도 전혀 윤리적이지 않다. 도경의 약점을 이용해 함정수사를 벌이고, 이를 눈치챈 박성배와 수 싸움을 벌이는 게 바로 <아수라>의 주요 골격이다. 어느 쪽이든 정의가 없고, 목표와 성과를 위해 달린다. 박성배의 비리를 캐내는 김차인(곽도원 분), 도창학(정만식 분) 검사도 사실 상부의 또 다른 이권을 위해 충성하는 하수인일 뿐이었다. 말 그대로 악인들이 지배하는 아수라판을 영화가 작심하고 묘사한 것이다.

악에 대한 상이한 태도

이야기의 소품이던 악인은 곧 이 세상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무서운 존재지만 여전히 다수의 사람은 악인과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기에 크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게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가 묘사한 악인이라면 최근 경향은 그와 다르다. 고의로 혹은 알게 모르게 이기심에 눈멀어 악인과 손잡은 무수한 보통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김지운 감독은 "당시 절대 악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며 "사이코패스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지 그렇다면 강한 타격감을 줘야 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그 고통을 똑같이 알아야 하지 않은지 그 질문에서 시작한 것"이라 말했다. 복수극 안에 심어놓은 악에 대한 원초적인 궁금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엔 악에 대한 배타적·징벌적 태도가 깔려있다.

 영화 <아수라>의 한 장면.

영화 <아수라>의 한 장면. ⓒ 사나이픽쳐스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은 "변변한 보상도 없이 악당 졸개만 하다 불쌍한 최후를 맞는 인생이 얼마나 고단할지 생각해봤다"며 "불쌍하지만, 동정심이 가지 않는 그 사내들이 궁금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힌 바 있다. "요즘처럼 사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당이 돼야 했다면 아주 잘못된 판단은 아니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말에서 악을 대하는 일종의 낭만적 관점마저 엿보인다.

칼과 권총, 혹은 각종 날카로운 사물을 통해 신체 각 부위를 해하는 사실적 묘사. 두 작품 모두 악인과 그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하지만 악을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한 번도 악이 지배하지 않았던 평온한 세계가 <아수라>에 와서는 '실은 원래부터 이 사회는 악인들이 지배하는 곳이었다'며 깜짝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묘사 방식과 표현 수위에서 막 개봉한 <아수라>는 <악마를 보았다>와 비견될 여지가 크다. 관객에 따라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악인의 계보'를 염두에 두고 관람해보면 어떨까. 적어도 이런 작품들은 우리가 참고할만한 좋은 묵시록인 건 분명하다.

아수라 악마를 보았다 정우성 김지운 황정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