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음치인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나면 간혹 노래방을 가곤 했는데 자신이 음치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노래를 너무 열심히 부르는 터라 아무도 그 친구를 대놓고 비웃지 않았다. 사실 어쩔 땐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그 친구는 언제나 당당하게 마이크를 들고 노래했기 때문이다. 뭘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 친구를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마가렛트 여사는 현실에서 느끼는 사랑의 결핍과 삶의 공허함을 순수하고 맹목적인 음악에의 열정으로 채우려 한다.

마가렛트 여사는 현실에서 느끼는 사랑의 결핍과 삶의 공허함을 순수하고 맹목적인 음악에의 열정으로 채우려 한다. ⓒ 메멘토 필름스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영화 <플로렌스>는 최악의 음치 소프라노로 알려진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라는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앞서 개봉된 자비에 지아놀리 감독의 영화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 역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삶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음치임에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이 훌륭한 성악가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노래했던 플로렌스. 그녀의 삶과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두 감독의 변은 플로렌스가 현실에서 보기 드문 매력적인 인물임을 확인하게 한다.

음치 플로렌스를 다룬 두 영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사는 사람이 현실의 진실과 마주했을 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자비에 지아놀리 감독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영화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은 마가렛트(까트린 프로)가 현실에서 느끼는 사랑의 결핍과 삶의 공허함을 순수하고 맹목적인 음악에의 열정으로 환치시킨다. 여전사가 된 듯 갑옷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하거나 전위 예술가들의 난장판 무대인지도 모른 채 관객 앞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노래해 웃음거리가 되고 만 사연은 그녀의 환상이 현실로 구체화한 사례다. 마가렛트의 남편인 조르쥬 뒤몽 남작(앙드레 마르콩)이 그녀를 '괴물'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가렛트를 지탱하고 있는 이러한 환상에 대한 혐오감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가렛트에게 (그녀가 음치라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플로렌스는 음악이 곧 자신의 삶이라 여기며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건강이 악화된 몸을 힘겹게 버텨 나간다.

플로렌스는 음악이 곧 자신의 삶이라 여기며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건강이 악화된 몸을 힘겹게 버텨 나간다. ⓒ 이수 C&E


반면, 영화 <플로렌스>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사는 마가렛트와 달리 플로렌스(메릴 스트립)가 금전적 후원을 원하는 음악가들과 그녀의 재력에 의존해 매니저를 자처하는 남편 베이필드(휴 그랜트)의 기만이 만들어낸 환상 덕분에 건강이 악화된 몸을 힘겹게 버텨 나가고 있음을 애처롭게 그려낸다. 이는 음악을 자신의 생명 끈으로 부여잡은 그녀에게 왜 환상이 필요한가를 관객에게 설득하고자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덕분에 남편 베이필드의 기만은 '플로렌스를 사랑해서' 혹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라는 변명으로 합리화된다.

두 영화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과대평가한 주인공이 대중 앞에서 노래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환상을 무너뜨리고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마가렛트와 플로렌스가 도달하는 진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을 띤다.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던 마가렛트가 녹음된 자신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혼절한 것은 그녀가 적어도 자신의 음악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반면, 플로렌스는 자신의 노래를 녹음한 음반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기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시도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기만과 자신의 환상을 끝까지 고집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야 자기 삶을 지금처럼 지탱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최악의 가수'라 평한 어느 기자의 말에 결국 쓰러지고 만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그녀에겐 진실보다 중요했던 것일까. 이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기반한 플로렌스의 자아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아에 대한 환상,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가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쿨리(Charles H. Cooley)는 '거울 자아' 이론을 통해 개인의 자아가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즉,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나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어떤 평가를 내릴지 상상한 것을 바탕으로 자아상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거울 자아' 이론은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타인의 평가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주는 근거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객관적이지 않다면? 우리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인해 타인의 평가가 공정성을 잃었다면? 마가렛트와 플로렌스는 비록 자아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품었지만 이는 타인의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평가이자 기만 위에 성립된 것이므로 이들을 향한 비난과 조소는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는 자아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은가. 잘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잘 한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얼마쯤 애쓰고도 있지 않은가.

마가렛트와 플로렌스를 보며 고등학교 시절 음치였던 그 친구가 떠올랐던 것은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하는 그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가 무슨 소용인가. 그저 내가 노래를 부르는 이 순간이 행복한 것을. 플로렌스가 마지막 순간에 베이필드를 향해 남긴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못 부른다고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 안 불렀다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요."

플로렌스의 이 말은 우리에게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노래를 못 부른다고 해서 도중에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끝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리라. 나는 그 친구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노래하고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진주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ongah7)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플로렌스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 메릴 스트립 까트린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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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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