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05세에 접어든 독일 할머니가 있다. 무려 1세기를 넘게 살았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게다가 이 할머니는 독일 나치의 선전을 담당한 요제프 괴벨스의 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 할머니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나치'로 불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긴 했지만, 순전히 방송국 취업을 위해서였다. 괴벨스가 이끌던 국민계몽선전부에서 비서 및 속기사로 일했지만, 오직 비서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행한 만행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도 전쟁이 끝난 이후에서야 알게 됐다고.

8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아시아 프리미어로 공개된 <어느 독일인의 삶>은 올해 105세(촬영 당시 104세)로 2차 세계대전 당시 괴벨스의 비서였던 브룬힐데 폼셀과의 인터뷰, 2차 세계대전 시대상을 담은 뉴스릴, 프로파간다 등 푸티지 영상으로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본다.

폼셀은 '몰랐고, 자신에겐 죄가 없다'고 한다

인터뷰는 순전히 폼셀의 관점, 당시 그녀가 보고 느낀 사적 기억을 토대로 진행된다. 괴벨스의 비서였고, 나치당원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없던 폼셀은 나치 정부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지극히 평범하고 선량한 독일인이다. 그녀에게는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던 유대인 친구가 있었고, 자신이 몸담은 나치 정권의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후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폼셀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들도 나치가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대공황까지 겹쳐 극심한 빈곤과 무기력을 겪고 있던 독일 국민에게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설파하며 강력한 독일 재건을 외치는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희망이자, 태양으로 다가왔다.

히틀러가 독일을 재건해줄 것을 믿으며 그에게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정작 나치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한들 모두가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그 말을 들어줄 이도 없었다.


하지만 몰랐다는 사실이 이해받을 순 있어도 용서받을 수는 없다. 폼셀은 몰랐기 때문에, 70여 년 전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죄가 있다면, 나치 권력이 집권하게 한 독일 모든 국민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한다. 나치 협력자의 비겁한 자기변명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상당수의 독일 국민이 나치를 지지하고 추종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히틀러와 나치의 실체를 알고 그들을 지지한 독일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유대인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홀로코스트를 찬성하진 않았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괴벨스 밑에서 일했던 폼셀도 당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전쟁을 묵인하고, 나치가 만행을 저지르도록 엄청난 권력을 준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반성하고 노력한다. 그것이 대부분 독일인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태도다.

<어느 독일인의 삶>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는 단계'에 그치지 않는다. 몰랐다고 한들, 그 무지로 벌어진 국제 범죄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 또한 지나치지 않고 인지하고 기억할 것을 되새기게 한다. 모르는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몰랐다고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책임에서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과연 우리들은 자신이 잘 몰랐고,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연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에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 말하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죄는 없지만, 나치 같은 권력이 집권하게 도와준 독일 국민 모두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독일 할머니의 고백. 역사의 피해자이면서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어느 독일인의 삶>은 가장 필요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