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 KAFA


천만 인구 시대에 맞닿은 서울, 그 어디를 가든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스친다. 그래서일까. 흔한 것일수록 그 가치를 무시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를 사람에게까지 적용하는 천박한 면이 우리 사회에 분명 있다.

서울 안에서도 종로는 상징적인 곳이다. 과거엔 문화의 중심으로 온갖 군상이 모여 불빛이 꺼질 날이 없던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이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일부가 심히 노쇠한 지역이기도 하다. 마치 신체 일부 모세혈관에 죽은피가 흐르듯 말이다. 종로3가와 종묘, 종각 부근을 하릴없이 누비는 노인들이 그 증거다.

또 하나 상징적인 곳이 있으니 이태원이다. 종로와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이곳은 경제 계급의 격차가 가장 극명히 대비되는 곳이기도 하다. 클럽과 온갖 술집으로 가득한 대로를 경계로 한쪽엔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다른 쪽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서민이 살고 있다. 

공간의 영화

오는 10월 6일 개봉 예정인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바로 이 두 곳의 민낯이 담겨있다. 종로3가 일대에서 박카스를 건네며 넌지시 노인들에게 말을 건네는 소영(윤여정 분)은 흔히 말하는 '박카스 할머니', 즉 몸을 팔며 근근이 먹고 사는 노인이다. 영화는 소영을 중심으로 그가 만나는 사람과 그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동시에 소영은 생명이 붙은 약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인물이다. 졸지에 엄마를 잃어버린 코피노(필리핀 여자와 한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무심결에 집에 데려오고 밤마다 우는 고양이에게 자신의 밥을 나누며, 힘없이 죽어가는 노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생의 최전선에 몰려 몸을 판다고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생에 대한 감수성은 그 누구보다 민감하며 사랑으로 가득한 이가 바로 소영이다.

소영의 거처가 바로 이태원이다. 윗층엔 집주인 트랜스젠더 티나(안아주 분)가 살며 옆방은 한쪽 다리를 잃은 장애인 도훈(윤계상 분)이 산다. 삶의 막바지에 몰린 이들은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악만 남았을 것 같지만 그 반대다. 짓궂은 농을 툭툭 던질지언정 서로에 대해 잘 알며 어려움을 공유하고 의지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포스터.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포스터. ⓒ KAFA


이들이 채운 서울은 미처 우리가 바라보려 하지 않았던 낯선 공간이다. 인구 공동화 현상이 심한 종로에서 치열하게 일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노인들은 그저 스치는 풍경이었고, 이태원 클럽가에서 술과 음악에 취할지언정 이주노동자와 트랜스젠더 역시 기피 혹은 편견의 대상이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죽여주는 여자>는 공간의 영화다. 거동이 느린 노인의 눈이 곧 카메라이며, 그 카메라가 비추는 곳곳은 빨리 걷거나 차로 달려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서울의 모습이다.

사람의 영화

종종 우린 평범함의 함정에 빠진다. 평범한 삶을 추구한다며 조금이라도 더 뛰려고 하고, 조금 더 벌고 앞서 가고자 한다. 열심히 산다는 미명 하에 바쁨과 정신없음을 미덕처럼 여기기도 한다.

<죽여주는 여자> 중후반에 등장하는 세 명의 노인 역시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현재 역시 그런 삶을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육체는 그들을 배신했다. 갑자기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 노인과 치매 증상을 느끼는 또 다른 노인의 모습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채워진 인생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들이 "제발 도와달라"며 그러니까 안락사를 위해 조력자가 돼달라고 소영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그래서 애잔하게 다가온다.

기꺼이 힘을 보태는 소영은 말 그대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섹스를 잘한다며 노인들 사이에 소문난 그 별명의 뜻이 전복되는 순간이다. 이 죽여주는 여자를 만난 노인들의 마지막 표정이 참 편안하고 정갈해 보인다. 26일 서울 왕십리 CGV 언론 시사에 참여한 이재용 감독은 "백세시대가 축복인지 재앙인지 모르겠는 요즘"이라며 "우리가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이미 때가 늦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소영과 세 노인을 통해 우리가 폐기처분했던 행복의 참뜻을 다시 소환한 셈이다.

그리고 소영의 이웃들을 보자. 앞서 말한 트랜스젠더와 장애인 청년 모두 이 사회의 소외 계층이다. 이 세상의 직업이 다양한 만큼 소외인들 또한 그 모습이 다양하지 않았던가. 이주노동자, 노숙자, 독거노인, 여성, 동성애자 등 말이다. 영화 속에서 이들이 연대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문장에 암묵적으로 빠져 있는 사회적 약자를 <죽여주는 여자>는 포근하게 안았다. 이 영화는 곧 사람의 영화였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 KAFA


그 강력한 증거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돼 있다. 지난해 말 노동법 개악에 반대 투쟁을 벌이며 조계사로 들어간 한상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의 모습이 그대로 등장한다. 소영이 모처럼 이웃들과 임진각으로 소풍을 갔을 때 식당 안 TV에서 나오던 뉴스는 경찰 살수차에 쓰러진 농민 백남기 선생 관련 소식이었다. "영화를 찍던 중에 우연찮게 그 사건과 시기가 겹쳤다"며 "의도하지 않았지만 동시대에 벌어진 사실성을 피해가는 게 더 어색하다고 생각했다"던 이재용 감독의 말을 덧붙인다.

소중한 것과 중요한 것, 그리고 필요한 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 흐려지는 요즘이다. 혹시 우리는 이 모든 걸 뒤바꾼 채 살고 있진 않은지. <죽여주는 여자>가 느릿느릿 담은 공간과 사람의 미학이 그래서 소중하다. 참, 이렇게 서술한대로 보면 마치 이 영화가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일 것 같다. 그 반대다. "야 이 미친X아"라며 속 시원한 욕지기를 던지는 윤여정에 웃음이 피식 나며, 실제 트랜스젠더인 안아주는 자신을 놀리는 윤계상의 말을 유쾌하게 받아치는 호기를 보인다. 그만큼 소소한 웃음이 담긴 작품이다.

한 줄 평 : 서울과 사람에 대한 통찰이 놀랍다. 지나치지 말아야 할 영화
평점 : ★★★★ (4/5)

영화 <죽여주는 여자> 관련 정보


각본, 감독 : 이재용
출연 : 윤여정, 윤계상, 전무송, 안아주, 최현준
제공 : 영화진흥위원회
공동제공, 배급 : CGV아트하우스
제작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관람등급 : 청소년관람불가
러닝타임 : 111분
개봉 : 2016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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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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