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날이었다.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널을 지휘한 지 20주년이 됐다. 상대는 첼시였다. 첼시는 지난 벵거 감독의 아스널 지휘 1,000번째 경기에서 0-6 대패(2014년 03월 22일)를 안긴 장본인이다. 최근 첼시를 상대로 리그에서 9경기 동안 승리가 없었다(3무 6패, 2011년 10월 이후).

어쩌면 첼시는 벵거 감독이 가장 승리하고 싶었던 대상이었을 수 있다. 경기 후 벵거 감독은 "축구는 역사를 돌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념일은 오늘의 기록일 뿐이다. 오늘 우리는 좋은 경기를 했다"며 경기를 평가했다. 의연한 듯 말했지만, 벵거 감독의 기념비적 경기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한 것에는 벵거의 내려놓음의 미학이 발휘됐다.

내려놓은, 아름다운 축구

 벵거 감독은 아스널 지휘한 지 20년이 됐다.

벵거 감독은 아스널 지휘한 지 20년이 됐다. ⓒ 아스널 공식홈페이지


아스널은 프리미어리그에서 아름다운 축구를 하기 유명하다. 짧은 패스로 상대방 진영까지 접근해서 득점을 한다. 뻥축구(롱패스 중심의 축구)는 아스널의 플레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아기자기하게 만들어가는 축구는 아스널의 상징이자 그들이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축구였다.

시대가 흘렀고, 전술적 기조도 바뀌었다. 벵거의 아스널은 2003/04시즌 무패 우승(26승 12무) 이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 벵거 감독의 축구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많았지만, 자신의 축구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간헐적으로나마 리그컵을 우승했고, 부임 이후 단 한 번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4위 이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성과가 전술적 변화를 이끌 강한 계기로 이어지지 못하게 했다.

올 시즌은 벵거 감독과 아스널이 계약을 맺은 마지막 해다. 2014년 3년 재계약한 이후 아직 구단과 재계약을 하지 못한 벵거 감독은 영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솔직히 말하면 (감독으로서) 은퇴하는 게 두렵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좋지 못하다 아스널 팬들은 "벵거 아웃"을 외치고 있다. 자신이 20년간 쏟아왔던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변화가 필요했고, 합리적인 이적료 사용을 지향했던 벵거 감독도 최근 이적료를 지출해 월드 클래스에 가까운 선수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변화의 바람을 불고 있었다.  

첼시전은 그런 변한 벵거 감독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경기다. 아스널은 첼시를 맞아 패스에 집착하지 않았다. 전방에서 강하게 압박을 통해 볼을 탈취하면 전방과 측면의 선수들에 빠르게 볼을 내줘 역습에 치중했다. 벵거의 아스널은 첼시에 점유율을 내주면서도 간결한 역습을 통해 득점을 만들었다. 패스 숫자도 아스널(559)보다 첼시(561)가 많았다.

첫 번째 득점은 게리 케이힐의 실책이지만, 꾸준히 전방압박을 한 알렉시스 산체스의 부지런함과 벵거 감독의 전술이 빛났다. 벵거 감독은 "우리는 강한 페이스로 경기를 하기 지배하기 원했다. 우리는 사우샘프턴 상대로 초반 20분간 불안정했다. 그래서 우리의 일관되게 압박을 하기로 했다. 득점이 문제가 아니었다"며 자신의 전술방식을 설명했다.  

이미 두 골을 앞서간 아스널은 자신들의 강박관념과 같았던 아름다운 축구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압박축구를 펼칠 수 있게 됐다. 세 번째 득점은 변화한 아스널 축구의 정점을 보여줬다. 전반 39분 자기 진영 박스 부근에서 시작한 역습은 메수트 외질과 산체스 두 명의 선수로 쐐기골을 만들어냈다. 첼시 수비진은 무뎠고 아스널의 스피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유연한 대처와 제로톱

 아스널의 유연한 제로톱 사용법의 주인공

아스널의 유연한 제로톱 사용법의 주인공 ⓒ 아스널 공식 홈페이지


최근 아스널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건 최전방 스트라이커다. 올리비에 지루, 대니 웰벡이 있지만, 아스널이 2003/04 시즌 이후 리그 우승에 다가서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확실한 스트라이커 자원이다. 지루는 경기력이 일관치 않고 웰백은 부상이 잦다. 벵거 감독의 선택은 제로톱이었다.

중원에서 전방으로 볼을 배급해 줄 수 있는 선수들, 측면에 젊고 빠른 자원들이 풍부한 아스널엔 제로톱이 그럴듯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제로톱을 사용하는 아스널의 문제는 박스 안에 마무리를 지어줄 선수가 없다는 점이다. 측면을 돌파한 이후 크로스를 올려도, 중원에 외질이 볼을 잡아도 박스 안엔 상대편 수비수가 절대다수였다.

첼시를 상대로 벵거 감독은 접근법을 달리했다.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볼 점유율을 줄이는 대신 측면에 기동력 있는 알렉스 이워비와 티오 월콧 그리고 산체스를 통한 역습 축구를 구사하기로 했다. 과거처럼 측면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이워비와 월콧은 중원에서 외질과 함께 패스 플레이를 펼쳤다. 전반 13분 외질과 이워비가 중원에서 만들어가는 패스과정, 쏜살같이 들어온 월콧의 마무리에서 볼 수 있듯이 벵거 감독은 제로톱을 좀 더 유연하게 사용했다.

후반 첼시의 대응도 만만찮았다. 안토니오 콩테 감독은 후반 9분 파브레가스를 빼고 마르코스 알론소를 투입하면서 백스리로 전화하고 측면 공격을 강화했다. 백스리로 전환한 이후 오른쪽 윙백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의 측면 공격이 불을 뿜자 벵거 감독은 이워비를 대신해 풀백 키어런 깁스를 투입하며 첼시의 공세를 완화했다. 전술과 기민한 대처까지 벵거 감독은 유연하게 대처를 했다.

개막 이후 2경기 동안 승리가 없었던(1무 1패) 아스널은 4연승을 통해 리그 3위까지 뛰어올랐다. 벵거 감독의 내려놓음이 아스널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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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종현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fff156), 청춘스포츠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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