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해마다 추석만 되면 안방극장에 찾아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쿵푸스타 성룡이다. 오죽하면 '추석엔 성룡'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말도 옛 말이 되어버린 듯 하다. 언제부터인가 명절 연휴, 안방극장에는 잘 생긴 얼굴과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는 꽃미남 배우들의 '와이어 액션'이 성룡의 '스턴트 액션'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여심 자극하는 꽃미남들에게 안방극장을 내주고 밀려나버린 성룡은 이제 케이블 채널에서나 간간이 옛 명성을 자랑할 따름이다.

결국 올 추석에도 성룡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2의 성룡'을 자처하며 등장한 영화가 있다. 추석이 조금 지난, 지난 22일 개봉한 영화 <대결> 이야기다.

낮엔 취준생, 밤엔 무림 고수

 극중 주인공 풍호(이주승 분)가 황노인(신정근 분)으로부터 취권을 전수받는 장면. 이 장면 역시 성룡의 영화 <취권>에 대한 오마주다.

극중 주인공 풍호(이주승 분)가 황노인(신정근 분)으로부터 취권을 전수받는 장면. 이 장면 역시 성룡의 영화 <취권>에 대한 오마주다. ⓒ 스톰픽쳐스코리아


취직은 애저녁에 포기한 '이름만 취준생' 풍호(이주승 분). 낮에는 그저 할 일 없는 백수에 불과하지만, 밤만 되면 무림고수 '당산대형'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당산대형은 그가 활동하는 온라인 '현피카페'의 닉네임이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밤마다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다른 네티즌들과 오프라인 현피(맞짱)를 뜨는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고 벌어들이는 승부의 대가는 용돈벌이로도 제법 짭짤한 편.

그런 풍호에게는 유일한 혈육인 형 강호(이정진 분)가 있다. 형제는 닮는다고 했던가. 강호 역시 싸움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재주를 타고 났다. 아직도 철 없이 오프라인 현피나 뜨고 다니는 동생과 달리, 형 강호는 경찰이 되어 그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각종 폭력사건에 맨 몸으로 뛰어들어, 화려한 무술 실력으로 범인들을 제압하고 다닌다. 덕분에 그는 '다이하드 경찰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매스컴에까지 이름이 오른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사건이 맡겨졌다. 현피에 나섰던 도전자 한 명이 한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이른바 '현피 살인사건'. 경찰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현피를 알선하는 카페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이 와중에 풍호 역시 유력한 용의자로 긴급체포되지만 혐의 없음으로 석방된다. 하지만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풍호는, 도우미 활동을 하게 된 집에서 독거노인 황노인(신정근 분)을 만나게 된다.

한편, 강호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보던 국내 굴지의 게임회사 CEO 재희(오재호 분)는 "현피 살인사건의 범인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강호를 유인하고, 1:1 현피 대결 끝에 강호를 혼수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그가 바로 현피 도전자를 살해한 범인이었던 것. 낮에는 잘 나가는 대기업 CEO지만, 밤만 되면 가면을 쓰고 나타나 현피 도전자들을 살해하는 사이코패스가 그의 진짜 정체였다.

사건의 배후에 재희가 있음을 눈치 챈 풍호는 재희에게 도전하지만,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감에 좌절하고 있던 풍호 앞에 구세주처럼 황노인이 등장한다. 길거리에서 벌어진 양아치들과의 시비 끝에 집단으로 폭행 당할 뻔한 풍호를 황노인이 '취권'으로 구해준 것. 풍호는 황노인에게 밤낮으로 매달린 끝에, 취권을 배우게 되고 밥에 막걸리를 말아마시는 노력 끝에 완성한 취권으로, 형의 복수에 나선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극중에서 풍호의 형 강호(이정진 분)가 재희(오지호 분)에게 처참하게 맞는 장면

극중에서 풍호의 형 강호(이정진 분)가 재희(오지호 분)에게 처참하게 맞는 장면 ⓒ 스톰픽쳐스코리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했던가. '한국형 액션영화의 탄생', '성룡을 대체할 새로운 취권 고수의 등장' 등 화려한 수식어를 내걸고 등장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영화 <대결>은 결국 '본전' 생각이 나게 만드는 영화였다.

우선 밋밋하고 뻔한 스토리 전개는 관객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유발시킨다.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은 1시간 30분으로,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반전 없이 뻔하게 흐르는 스토리는 다음 장면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질 않는다. 관객들이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스토리 구조는 영화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철 없는 주인공이 가족의 복수를 위해 은둔 고수에게 무림비급을 전수받아 끝내 복수에 성공한다는 내용은 1970~1980년대 전형적인 홍콩무협영화의 스토리 구조였다. 애시당초 다양한 반전이 버무려진 스토리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기엔 너무나 밋밋한 구조일 수밖에 없었다.

뻔한 스토리만큼이나 작중 대사들도 판에 박힌 듯 진부하기 짝이 없다. 형의 복수를 위해 취권을 배우고자 하는 풍호에게, 황노인은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라며 근엄한 표정으로 충고한다. 도대체 이런 유치하고 진부한 대사를 진지하게 읊어대는 이유가 뭘까. 결국 취권을 안 가르쳐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비장의 무기였던 '액션'마저 살리지 못해

 성룡의 영화 <취권> 속 스승 소화자(원소전 분)를 오마주로 하여 만든 캐릭터 황노인(신정근 분). 그러나 그의 캐릭터는 모호했다. 소화자도 아니었고, 황노인도 아니었다. 어색한 연기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마냥 거북했다.

성룡의 영화 <취권> 속 스승 소화자(원소전 분)를 오마주로 하여 만든 캐릭터 황노인(신정근 분). 그러나 그의 캐릭터는 모호했다. 소화자도 아니었고, 황노인도 아니었다. 어색한 연기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마냥 거북했다. ⓒ 스톰픽쳐스코리아


물론 영화 <대결>에는 스토리상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액션'이다. 스토리가 아무리 빈약해도, 액션의 질이 높았다면 관객들로부터 이렇게까지 극심한 혹평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대결>은 이 필살기마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대결>은 나름대로 '현피'라는 독특한 소재를 가져오면서까지 액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취권은 물론이고 견자단의 <엽문>으로 유명한 영춘권과 <아저씨>의 원빈이 사용한 칼리 아르니스, 말레이시아 전통무술인 실랏까지 다양한 무술의 등장을 예고하며, 개봉 전부터 영화 속 액션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 어디에도 견자단, 원빈은 없었다. 영화는 허접하고 조잡한 7, 80년대 무협영화식 액션의 연속일 뿐, 견자단의 호쾌한 주먹도, 원빈의 빠른 손놀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액션으로는 이미 <아저씨>와 <용의자>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신동엽 감독은 제작보고회 당시 "과장된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며 "현실적인 액션을 담아보자 해서 현피라는 소재를 갖고 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현실적인 액션의 기준이 무엇일까 내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의 액션 연기가 어설펐던 점도 아쉽다. 주인공 풍호 역을 맡은 이주승과 그의 사부 황노인 역을 맡은 신정근은 영화를 위해 수 개월 간 액션스쿨을 다니며 실제 취권의 전승자로부터 취권을 배우기도 했단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취권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 성룡의 취권을 따라가기엔 한참 멀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거북했던 배우들의 연기

 낮엔 대기업 CEO, 밤엔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재희 역을 맡은 오지호. 그의 연기 역시 아쉬웠다.

낮엔 대기업 CEO, 밤엔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재희 역을 맡은 오지호. 그의 연기 역시 아쉬웠다. ⓒ 스톰픽쳐스코리아


배우들의 캐릭터 연기 역시 기대 이하였다. 낮에는 대기업 CEO, 밤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는 양면의 얼굴을 가진 한재희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러나 오지호가 연기한 한재희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마냥 어색하게 다가왔다. 영화 <베테랑> 속 조태오(유아인 분)의 광기 어린 눈빛도 없었고, 과도하게 깔아내린 목소리는 느끼하기만 할 뿐, 오히려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성룡의 영화 <취권> 속 소화자(원소전 분)를 오마주하여 만든 황노인이라는 캐릭터 역시 부자연스러움의 극치였다. 노인 역할을 하기 위해 중년의 배우에게 흰 가발을 씌웠다지만, 어설픈 노인 분장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낸 것처럼 캐릭터의 정체성 역시 모호했다. 차라리 소화자에 대한 어설픈 오마주가 아니라 황노인만의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설픈 오마주는 원작에 대한 모독에 가까워

 영화 <대결> 공식 포스터

영화 <대결> 공식 포스터 ⓒ 스톰픽쳐스코리아


오마주란 프랑스어로 '존경, 경외'를 뜻한다. 영화에서 오마주란 존경하는 감독이나 감명 깊게 본 영화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해당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어설픈 오마주는 오히려 원작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특히 영화 <대결>은 과도한 오마주로 인해 오히려 오마주 본연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배우들의 대사와 상황 설정, 심지어 취권을 연마하는 과정까지 성룡의 <취권>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인용 수준이 아니라 <취권>의 아류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영화를 만든 신동엽 감독은 기자 간담회를 통해 "견자단, 성룡 등 고수에게 보여줬을 때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견자단과 성룡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기 부끄러운 건, 나만의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

그나마 한 가지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는 희미한 추억으로 자리잡은 취권을 어설프게나마 다시 한 번 스크린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취권>을 비롯해 70년대 홍콩무협영화에 대한 기억이 있는 세대들에겐 잠시나마 아련한 향수를 느끼는 시간이 될 것이다.

대결 취권 오마주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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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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