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내 또래가 그랬지만, 나는 근현대사 대부분의 굵직한 사건들을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건은 진행형이기보다는 과거형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하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대신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야 할지를 가르쳐줬다. 가령 한국 전쟁은 분단을 가져온 '민족의 비극'이었고, 북한군에 맞서 남한 정부를 지켜낸 군인들은 '숭고한 희생'을 치렀다는 식이다. 적어도 유년 시절, 나에게 역사는 도저히 끼어들 틈새가 없는 촘촘한 것이었다. 이미 결론은 내려졌고 남은 건 외우는 일이었다. 생각의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엄청난 사건 속에서 죽어간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그 죽음이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나에겐 몇년도에 어떤 일이 발생했고, 몇 명이 죽었는지보다 그것이 더 궁금했다. 폭탄에 몸이 찢긴 사람들, 뼈가 부러진 채 길에 방치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나는 그들이 기억하는 그 시간은 분명 우리가 배우는 것과는 다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선 전쟁을 다룬 드라마를 자주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단말마'라는 표현처럼, 평범한 사람의 죽음은 빠르게 화면 속에서 사라져갔다. 카메라는 애국, 전우애, 민족적 사명을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만 바싹 붙었다.

<만신>이 전하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

 무당 김금화, 그녀의 삶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무당 김금화, 그녀의 삶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 (주)엣나인필름


그렇게 어린 시절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던 생각은, 몇 년 전 영화 <만신>을 보며 다시 떠올려졌다. 만신은 한국 최고의 무당으로 일컬어지는 김금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1931년에 태어나 열일곱의 나이에 무당이 된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그녀는 위안부 소집을 피해 결혼을 했다 도망 나오고 신 내림을 받는다. 하지만 곧 한국 전쟁이 터지고, 그녀는 남과 북 모두에서 간첩으로 의심을 받아 생사를 넘나드는 도피에 오른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찾나 싶었던 그녀의 삶은, '미신타파'를 기치로 건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 그런데도 그 혼란한 시간 동안 그녀는 굿을 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하며 무당으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파주의 적군묘에서 김금화와 여러 만신이 지노귀굿(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기 위한 굿)을 벌이는 부분이다. 적군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무덤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에 참여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전쟁 당시 적군으로 간주하던 이들의 무덤이니 그 모습이 초라한 것은 말 할것도 없다. 조각난 시신들은 부분부분 담겨 조그마한 봉분으로 덮혀있다. 그 앞에는 망자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비석 대신 전투의 이름과 '불명인'이라고 적힌 각목만이 꽂혀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중심이 아닌 전쟁의 가장자리에서, 적지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매장된 공간인 셈이다.

그리고 망자의 넋을 대에 실어 생전의 한을 풀어주는 '망제대잡이'를 하는 부분에서, 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드러난다. 여기에는 흔히 말하는 숭고함, 희생 정신, 사명감 같은 것은 담겨있지 않다. 비명인지 애원인지 모를 비탄에 찬 울음,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게 만드는 고통,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망제대잡이를 하는 만신은 계속해서 통곡하며 '머리야'를 외치고, 이내 주저앉아 '어머니, 아버지'를 내뱉는다.

만신을 매개한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혼란에 가득차있다.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 앞에서 망자는 공포와 고통, 슬픔을 토해낸다. 전쟁을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은 품위있는 죽음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런 생의 끝맺음은 오직 소수의 사람에게나 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누락된 이야기들

 기억되고자 하는 이들. 그들은 증언한다. 무당의 입을 통해서.

기억되고자 하는 이들. 그들은 증언한다. 무당의 입을 통해서. ⓒ (주)엣나인필름


흔히 인용되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역사는 후대가 제대로 된 미래를 기획하기 위한 교훈적인 도구로써 사용되곤 한다. 물론 그런 방식의 기억하기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정작 그 사건을 겪었던 사람들, 고통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묻히곤 한다. 우리는 '비극'이라는 단어로 이들의 아픔을 갈무리하곤 하지만, 결국 그 말조차 그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관조적인 개념이다. 그 단어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그 사건의 가운데서 정면으로 풍파를 맞았던 사람들의 느낌을, 그들에게 그 사건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말하자면 당사자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영화 속 만신들은 굿을 통해, 죽은 사람들에게 입을 빌려줌으로써 기록되지 못한 그 목소리를 살려낸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을 산 사람들을 홀리는 미신이나, 신들에게 운명을 위탁하는 수동적인 행위라고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전쟁이나 재난과 같이 거대한 사건에 휩쓸린 많은 사람의 삶에서 능동이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이들에겐 볼 수 없는 신들보다 당장 생이 더 막연하다. 그리고 혼란에 떠밀린 인생 대부분에는 능동성이나 주체성보다는 '어쩔 수 없음'만이 가득하다. 만신들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저 안타까워할 뿐이다. 신들은 죽은 이들을 보살핀다. 만신들은 허리를 숙여 그저 그 길이 편안하길 부탁한다. 그리고 망자들의 입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 찬 삶을 미련 없이 정리하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 속에서, 만신들은 더는 미래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건져 올린다. 우리가 '앞으로'를 말하는 동안, 이제는 그조차도 불가능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리하기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죽어버린 이들의 말을 전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영화 속 만신들의 굿은 윤리적인 행동으로 다가왔다.

증언하기로서의 굿

 기억되는 건 오직 소수뿐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되는 건 오직 소수뿐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 (주)엣나인필름


생각해보면 무당의 굿은 증언하기와 비슷하다. 이것이 있었던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과 사의 벽을 넘어 당사자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일, 그 말들을 빠뜨려버린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이 만신들의 일이 아닐까.

영화는 어린 김금화가 쇠 걸립을 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쇠 걸립은 마을의 못 쓰는 쇠를 모으는 일로, 이때 모은 쇠는 녹여져 신 내림 때 사용될 방울과 칼이 된다. 굿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굿을 통해 전해져 산 사람의 세계에서 방울 소리로 울리고 칼을 흔드는 몸짓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소리와 몸짓은 우리가 말하는 역사와 먼 곳에 있지 않다. 어린 김금화의 치마폭에는 총과 총알, 낡은 카메라가 담긴다.

사족이지만 이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은 내게 아쉬움을 표했다. 물론 영화와 영상으로 기록되긴 하지만, 결국 만신들이 전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도 '말'이지 않느냐고. 그 이야기는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만신들이 굿을 끝냄과 동시에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그조차도 나에겐 삶의 한 단면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삶과 죽음은 잊힌다. 기억되는 것은 소수다. 그 사람들조차 산 사람의 긴 인생에 비춰보면 찰나에 가까운 순간에 호출되고 퇴장하길 반복한다. 우리는 기록으로든 기억으로든 자신의 삶이 영속적으로 남길 희망한다. 어른들이 제사에 목을 매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잊히는 삶이 보편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쉬워할 것도, 미련을 가질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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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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