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이전에는 추석 명절에 옷 선물을 기다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추석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시대다.  

추석 옷 선물에 대한 기대감은 사라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것은 '현금 선물'에 대한 확고한 기대감이다. 현금 선물보다야 훨씬 못하지만, 예전보다는 기대감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기대하는 선물이 또 하나 있다. 방송국에서 주는 추석 선물, 추석특선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추석 때마다 나오는 특선영화에는 거의 항상 사극이 껴있다. 지상파 3사를 기준으로 하면, 지난 5년간 매년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사극 영화가 추석 안방극장을 차지했다. 이렇게 선정된 영화들은 대체로 개봉관에서 대형 히트를 했을 뿐 아니라 여러 연령대가 골고루 즐길 수 있거나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시청할 수 있거나, 아니면 무조건 재미있거나 혹은 대한민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관이나 정서에 부합한다.

5년 전인 2011년 추석에는 두 편의 사극 영화가 방영됐다. <전우치>와 <조선 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다.

<전우치>와 <조선명탐정>... 추석 특선 단골 손님
 

ⓒ 영화사 집

 
<전우치>(감독 최동훈, 주연 강동원)는 조선 중기 마술사인 전우치를 환상적이면서도 코믹하게 다룬 작품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요괴들, 그들을 추적하는 화담 서경덕과 신선들, 그리고 서경덕 팀과 별도로 요괴들을 추적하는 전우치가 16세기 조선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오가며 한데 뒤엉켜 삼중 대결을 펼치는 내용의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전우치가 도사로 묘사됐지만,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조선 중기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전우치는 도사가 아니라 마술사였다. 당시 사람들한테는 마술의 비밀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도사로 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전우치와 서경덕과 요괴들의 대결이 빚어내는 시각적 화려함, 또 많은 웃음을 시청자들에게 주는 작품이다. <전우치>는 2013년과 14년에는 EBS에서 추석특선영화로 나왔다.
 

ⓒ 청년필름

 
감독 김석윤에 주연 김명민·오달수로 나온 <조선 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은 조선 정조 임금의 특명을 받고 공납 비리를 수사하는 두 인물의 활동을 코믹하게 다룬 작품이다. 시종일관 웃음을 주다가 막판에 정조의 개혁 정신을 은근히 홍보하는 시대정신도 살짝 갖춘 영화다. KBS 2TV에서 방송됐던 <조선 명탐정>은 이듬해인 2012년에도 KBS 1TV 추석특선으로 방영됐다.

<조선 명탐정>이 2년 연속 추석특선이 된 데 이어, 2013년에는 SBS에서 <평양성>을 추석특선으로 내놓았다. 2013년은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로 다시 들어간 해였다.

감독 이준익에 정진영·이문식 주연인 <평양성>은 2003년에 나온 <황산벌>과 시리즈를 이루는 작품이다. 668년 신라·당나라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함락을 다룬 작품이라서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추석 명절에 함께 볼 수 없는 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남북 지도자가 추석 때 함께 봐도 괜찮을 만큼 좋은 영화다.
 

ⓒ 타이거픽쳐스·아침

 
<평양성>에서 신라 김유신(정진영 분)은 당나라 군대의 패배를 일부러 유도한다. 신라 본진의 출전을 고의로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반란자들이 평양성 성문을 열어주는 것조차 방해한다. 동족의 땅인 평양성이 외세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물론 그것은 영화 속 김유신의 신념이다. 그런 애족 정신이 영화 속 김유신을 그렇게 움직였다.

결국, 영화 속 김유신은 신라군과 고구려군을 한데 묶은 뒤 당나라군을 평양성에서 쫓아내 버린다. 신라군 속에는 거시기(이문식 분) 같은 백제 출신도 다수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고구려·백제·신라의 민족대단결을 통해 당나라를 쫓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사기록과의 일치 여하를 떠나 이런 허구, 이런 가공은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 해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한 영화들?

SBS에서 <평양성>을 보여주던 그해에 KBS2에서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틀어주었다. 추창민 감독에 주연이 이병헌인 이 작품은, 광해군과 똑같은 외모를 갖고 태어나 광대 생활을 하던 남자가 광해군의 대역이 돼 잠시 임금 노릇을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인간미 넘치는 왕의 모습을 보여준 가짜 광해군을 지켜보면서 '통치자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고민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 리얼라이즈 픽처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재입성하던 해의 추석에는 민족단결의 훈훈함과 지도자의 자질을 강조하는 두 작품이 추석특선이 됐다. 물론 이후 3년간 전개된 상황들을 보면, 그 해 추석에 두 작품의 기운이 광화문과 경복궁 경내를 뚫고 나가다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앞에서 힘없이 사그라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2014년 추석에는 감독 한재림에 주연 송강호·이정재로 나온 <관상>이 SBS에서 방송됐다. 한편, EBS에서는 <전우치>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내보내고, 케이블방송인 CGV에서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최종병기 활>을 내보냈다.
 

ⓒ 주피터 필름

 
<관상>은 관상학을 소재로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내경(송강호 분)은 수양대군이 보낸 가짜 수양대군의 관상을 보고 '역모를 꾸밀 재목이 못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을 지지하지 않았다가 그 결과로 참혹한 수난을 겪게 된다.

<관상>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한 실제 인물이 있었다. 고려 말에 이성계·이방원의 반대편에 섰다가 조선 개국 뒤에 이방원의 핵심 측근이 된 하륜이 바로 그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관상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이방원의 관상이 특이하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이방원을 방문했다.

찾아가서 면전에서 살펴보니 이방원 관상의 최대 특징 중 하나는 '콧마루가 높고 눈썹 부근 이마가 용 같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관상학 서적인 <마의상법>에서는 "코가 높아서 우러러볼 만하면 관직 생활이 영화롭게 된다"고 말했다.

방원이 잘되리라고 확신한 하륜은 정적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방원과 친분을 쌓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태종시대에 정권 실세가 될 수 있었다. 영화 속 내경 못지않게 실제의 하륜도 <관상>의 주인공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영화는 이듬해인 2015년에도 SBS에서 추석특선이 되었다. 

작년도 2015년에는 SBS에서 <관상>을 보여주고 KBS2에서 <명량>을 보여주었다. 한편, EBS에서는 <왕의 남자>를 다루었다. <명량>이란 작품은, 대흥행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이순신을 다루었고 또 배경이 주로 바다여서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에, 추석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에 별다른 집중력 없이 여러 세대가 함께 시청할 수 있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16년에는 KBS2에서 최민식 주연의 <대호>가 방영된다. 줄거리가 비교적 단순하고 "어흥!"하는 울음소리가 인상적이어서, 떠들썩한 추석 분위기에도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호랑이 멸절 과정을 보며 여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다.

지난 100년간 한민족의 삶을 어렵게 만든 주범이었던 것도 모자라 오늘날에도 자위대의 군대화 및 평화헌법 개정론 등을 통해 한민족을 위협하는 일본을 상대로, 한민족 전체가 "어흥!"하며 호통을 쳐줄 수 있는 분위기가 추석 명절에 이런 영화를 통해서라도 조성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좀 지나친 무리일까.
 

ⓒ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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