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하일성, 영원한 야구인과의 작별  고 하일성 전 야구해설위원의 빈소가 8일 오후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김인식 국가대표 감독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서울현충원 충혼당이다.

▲ 고 하일성, 영원한 야구인과의 작별고 하일성 전 야구해설위원의 빈소가 8일 오후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김인식 국가대표 감독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서울현충원 충혼당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야구해설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일성씨가 세상을 떠났다. 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고 하일성씨는 야구팬은 물론이고 웬만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름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하일성이 남긴 공로는 역시 초창기 '한국야구의 대중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고등학교 체육교사 시절이던 1979년 동양방송(TBC)에서 고교야구 해설을 맡으며 방송에 처음 입문한 이래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는 KBS로 자리를 옮기며 무려 30여 년간 허구연 MBC 해설위원과 쌍벽을 이루는 '국민해설위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돌이켜보면1980~1990년까지의 스포츠 중계란 참 단순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중계기술이 발전된 시절도 아니었고, 세부적이고 전문화된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도 보편화되지 않았다. 굳이 하일성이나 야구중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내의 다른 종목 역시 해설가들의 역할이란 주로 뻔한 정보의 나열이나 혹은 결과론적인 훈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발 앞선 예측이 주는 긴장감, 하일성 해설의 묘미

하지만 하일성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칫 단순한 상황전달의 반복이 되기 쉬운 스포츠 중계에 기승전결의 긴장감과 스토리텔링을 할 줄 아는 해설가였다. 하일성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야구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하여 당시로서는 팬들이 일일이 접할 수 없는 현장 정보력에 가장 강점이 있었던 해설가였다. 이런 정보력을 바탕으로 하일성은 중계 때마다 언론에서도 접할 수 없는 프로 세계의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또한 하일성의 토크에는 요즘으로 치면 마치 힙합하는 래퍼들을 연상시키는 묘한 리듬감이 항상 있었다.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해설 속에서도 그 상황에서의 관전포인트를 확실히 집어내고, 중간중간 경기의 흐름이 처진다 싶을 때는 캐스터와의 뜬금없는 만담과 '아재 개그'로 중계의 긴장과 이완 사이에 강약 균형을 조절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해설가였다.

무엇보다 하일성 해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항상 투수와 타자의 대결, 벤치의 운영 등을 놓고 앞으로의 상황을 한 발 앞서 예측하는 일종의 스무고개 같은 형식을 띄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해설위원에게는 예측이 자꾸 빗나갈 경우 해설의 신뢰도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위험부담이었지만, 바로 그런 긴장감이 하일성 해설의 묘미이기도 했다.

중계를 듣는 야구팬들은 하일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과연 그의 예측이 맞을까 틀릴까를 보는 것도 하나의 묘미였다. 하일성의 예측이 귀신 같이 들어맞았을 때는 '작두 해설'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물론 하일성도 자신의 예측이 빗나갈 경우를 대비하여 나름 '무적의 방패'(?)를 마련해 놓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제는 하일성의 대표 유행어로 굳어진 "역으로 가네요", "허를 찔렀어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네요", "이래서 야구 몰라요."같은 어록들이었다. 비록 훗날에는 지나치게 '감에 의존하는 해설', '핵심이 없고 장황한 만담'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분명 고만고만한 다른 해설가들에 비하여 차별화된 하일성만의 장점이었다.

특히 하일성은 자칫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야구의 룰과 다양한 상황들을,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명료한 언어로 풀어갈 줄 아는 전달력을 갖춘 해설가였다. 야구를 잘 모르던 이들도 하일생의 해설을 들으며 야구의 재미에 입문한 이들이 적지 않다.

해설위원 출신 첫 KBO 사무총장, 독이 될 줄 몰랐다

고 하일성, 영원한 야구인과의 작별 고 하일성 전 야구해설위원의 빈소가 8일 오후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서울현충원 충혼당이다.

▲ 고 하일성, 영원한 야구인과의 작별고 하일성 전 야구해설위원의 빈소가 8일 오후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서울현충원 충혼당이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일성은 이런 구수하면서도 능수능란한 달변을 바탕으로 야구 이외의 각종 방송 예능프로그램에도 잇달아 출연하며 유명세를 누렸다. 하일성은 2006년에는 해설위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KBO 사무총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한국 야구가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팀 단장을 맡으며 현장에서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다. 하일성이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꼈다고 고백한 순간이기도 하다.

당시 김경문 감독은 대표팀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더 하일성 사무총장에 대하여 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는  감독 선임에 난항을 겪으며 대표팀이 위기를 맞았지만, 김인식 감독을 설득하여 준우승이라는 값진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스포츠계에서는 하일성의 영향으로 초기만 해도 임시직이나 비주류로 여겨지던 '스포츠 해설위원'의 인지도와 위상이 높아진 면이 크다. 또한 하일성이 야구 덕분에 해설가로서 누린 수혜 못지않게, 초창기 프로야구가 하일성의 인지도와 대중성으로 바탕으로 외연이 확장된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하일성의 말년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2009년 이후 사기 혐의로 피소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11월에는 지인에게 3000만원을 빌린 뒤 변제를 미루다 사기 혐의로 피소돼 물의를 빚었다. 올해에도 입단 청탁 사기와 음주운전 방조 혐의에 휘말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장기인 해설 분야에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지는 모습도 드러냈다. 다양한 데이터와 분석 기술이 발전하고, 현역 프로 선수와 지도자 경력을 거치며 전문성에서 우위를 갖춘 후배 해설가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하일성의 해설가로서의 입지는 흔들렸다. 2000년대 중반 KBO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방송계 현장과 멀어진 것도 해설가로서는 독이었다.

팬들 먹먹하게 한 불행한 개인사

라이벌이자 동시대를 풍미한 허구연 MBC 해설위원이 프로 초창기 지도자로서 실패하고 90년대 이후로는 해설 외길 인생만을 걸으며 현장과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해왔던 것과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대중의 눈높이가 높아진 상황에서 감과 입담에만 의존하는 하일성의 해설은 야구이론이나 현장 정보력에서도 예전보다 뒤떨어졌다는 냉혹한 평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일성의 해설을 추억하며 성장해온 야구팬들에게는 아쉬운 장면이었다.

입버릇처럼 '야구 몰라요'를 이야기하던 그의 어록처럼, 인생도 모르는 것이었다. 오래전 타계한 고 김동엽 감독처럼 야구계 발전에 기여한 원로들이 말년에 불행한 개인사에 휘말리며 쓸쓸하게 세상을 등지는 모습은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방송에서 항상 위트있고 낙천적인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고인이기에 갑작스러운 추락과 불행한 결말은 팬들에게도 많은 충격을 줬다. 

비록 더 이상 하일성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가 야구계의 1세대 스타 해설가로 프로야구에 기여한 공로와 팬들에게 남겨운 추억만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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