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연출의 영화 <터널> 포스터.

김성훈 연출의 영화 <터널>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모사(模寫)'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베껴 그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본다.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풍경이나 인물을 묘사한 그림을.

이런 회화풍이 극단으로 치달아 대상의 일부분만을 기괴할 정도로 사실화하는 걸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이라 부르고, 이 사조는 이미 평론가들의 비평 아래 현대회화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형상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꼭 같이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만으로 하이퍼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그림을 '좋은 예술품'으로 불러야할 지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의 예술이란 '능란한 변용'과 '상징과 은유를 통한 의도적인 왜곡'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10일 개봉해 700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며 한 달 넘게 롱런 중인 김성훈 감독의 영화 <터널>. <더 테러 라이브>에 이어 영악스러울 정도로 연기호흡을 조절하며 원맨쇼를 펼치는 하정우의 관객동원력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여기에 하정우의 아내 역을 맡은 배두나의 호연과 이제는 '한국영화의 감초'라 불러도 좋을 오달수가 극이 지루하거나 신파조로 흐를 때 툭툭 던져주는 웃음도 나쁘지 않다. CG를 가능한 배제하고 콘크리트 덩어리와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연출한 터널 붕괴 신(scene)에선 스태프가 쏟은 공력이 짐작된다.

 <터널>에서 다시 한 번 관객동원력을 입증한 하정우.

<터널>에서 다시 한 번 관객동원력을 입증한 하정우.ⓒ 영화 홈페이지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제작진의 노력에도 '모사품'에 그쳐

그럼에도, <터널>을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영화"라고 불러주기엔 망설여진다. 능란한 변용과 은유와 상징을 통한 의도적 왜곡을 통해 창조에 이르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아서다. 이는 <터널>이 예술품이라기보다는 모사품으로 읽힌다는 이야기다.

<터널>은 설정과 등장인물의 면면, 드라마의 전개와 지켜보는 이가 느끼는 갑갑함까지 어떤 '특정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사건이란 바로 한국인 대부분에게 2014년의 봄을 공포와 고통으로 기억하게 만든 '세월호 참사'다.

하이퍼 리얼리즘을 등에 업고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가 인물과 대상을 정밀하게 모사한다면, 김성훈 감독은 <터널>을 통해 '세월호 참사'라는 사건에서 드러난 사실관계를 거의 동일하게 모사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등식이다.

터널 붕괴=선박의 침몰
부실공사를 야기한 한국병=위기대처 능력이 부재한 국가시스템
개인의 비극에 관심 없는 관료들=사고 현장 인근에서 기념촬영을 한 공무원
특종만을 좇는 언론인=유족에게 마이크와 취재수첩을 들이민 기자들

 배두나는 <터널>에서 하정우의 아내 역으로 호연했다.

배두나는 <터널>에서 하정우의 아내 역으로 호연했다.ⓒ 영화 홈페이지


현실을 그대로 옮겨오는 게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쉽사리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역사의 참극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환기시킨 것을 폄훼할 이유는 없다. "과오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 때론, 영화가 현실의 고통을 두려움 없이 마주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가 '예술'이 되기 위해선 현실의 정밀한 모사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변용과 은유, 상징과 복선이 없는 영화가 관객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리 없다. <터널>이 분노와 탄식을 넘어 감동에 가닿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들의 부재 탓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적 결함에 관계없이 <터널>은 관객들을 '간접체험을 통한 반성'에 이르게 한다. 이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이다. 아직도 한국사회는 '세월호' 혹은, '터널' 속 어둠에 갇혀 있다.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등의 저자. <경북매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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