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정> 포스터.

영화 <밀정> 포스터. ⓒ 영화사 그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밀정>은 의문의 일제 경찰, 황옥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 경찰이면서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과 행동을 함께했으며, 의열단과 함께 국내로 무기를 밀반입하다가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의 의열단 활동을 거짓으로 보고 있다.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황옥이란 인물은 <밀정>에서는 이정출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정출과 함께 폭탄 국내 반입 작전을 펼친 영화 속 김우진(공유 분)은 의열단 멤버 김시현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정출의 폭탄 투척으로 총독부 사람들이 대거 목숨을 잃는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황옥의 활약상은 실제 이상으로 화려하게 묘사한 데 비해, 영화 첫 장면에서 다룬 독립투사 김상옥의 활약상은 실제보다 축소시켜 묘사했다. 김장옥(박희순 분)이란 이름으로 첫 장면을 장식한 김상옥의 최후 투쟁을 실제보다 약한 톤으로 그러낸 것이다.

물론 <밀정>에서도 김상옥의 모습을 화려하게 다루긴 한다. 하지만, 3·1운동 4년 뒤인 1923년 1월 22일 있었던 그의 최후 행적을 살펴보면, 영화 속 장면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라소니를 능가했던 김상옥

 영화 <밀정> 속 김장옥(박희순 분)은 김상옥 열사를 모티브로 탄생한 캐릭터다.

영화 <밀정> 속 김장옥(박희순 분)은 김상옥 열사를 모티브로 탄생한 캐릭터다.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해방 직전에 시라소니 이성순이 일본 깡패 40여 명과 단독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주먹 세계에서 유명하다. 시라소니도 대단했지만, 김상옥은 훨씬 더 대단했다. 그는 1 대 40도 아니고 1 대 100도 아니고, 무려 1 대 1000으로 싸웠다. 싸움의 전설에 관한 한, 김상옥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23년 1월 22일이었다. 그날 김상옥은 일본 군경 합동부대와 1 대 1000으로 싸웠다. 그 1 대 1000의 전투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영화보다 실제가 훨씬 더 대단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선이 기울어가던 1889년,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 72번지의 가난한 집. 김상옥은 여기서 태어나 공장 및 대장간 생활과 방문 판매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20대 초반, 대형 철물공장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마디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독립운동이 아니라 사업에만 전념했다면, 민족자본가로 대성공을 거두었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사업을 하는 동안에도 김상옥은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했다. 사업가가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총까지 든 것이다. 국권 상실 6년 뒤인 1916년에는 전남 보성군의 헌병대를 기습해서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김상옥은 배짱 좋게도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었다. 어쩔 수 없이 상하이로 망명을 했다. 그러다가 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1923년 1월 서울에 잠입했다. 광화문 뒤편의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조선총독을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총독을 죽이겠다는 원래의 목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내로 들어오기 전에 김상옥은 폭탄 성능을 충분히 시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폭발 실험을 해보고자 했다. 대담하게도 그가 실험대상으로 삼은 것은 종로경찰서였다. 폭탄이 잘 터지나 보려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이다. 이로 인해 종로서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날이 1923년 1월 12일이다.

신화의 탄생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김상옥 동상.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김상옥 동상. ⓒ 김종성


종로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은 지금의 서울역 근처인 후암동에 닷새간 숨어 있었다. 하지만 5일 뒤인 1월 17일,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은신처는 일본 경찰들에 의해 포위됐고, 김상옥과 일경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은 1 대 21의 대결이었다. 이 대결에서 김상옥은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 경찰의 인명 피해는 사망 1명, 부상 3명이었다.

총격전 직후, 김상옥은 후암동 오른쪽 옆인 남산으로 도피했다. 500명 이상의 경찰이 그 뒤를 추적했다.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그는 500명 이상이 쳐놓은 포위망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고는 남산 동쪽 왕십리로 도주했다.

왕십리의 사찰에 가서 승복을 빌려 입은 김상옥은, 이번에는 북쪽에 있는 지금의 서울 강북구 수유리로 이동했다. 거기에 이모 집이 있었다. 닷새간 숨어 지내다가 이후그가 간 곳은 고향인 종로구 효제동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는 효제동 72번지에서 태어났다.

김상옥이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는 동안, 일본 측은 그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결국 일본은 효제동에서 그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후암동에서 그의 전투력을 확인한 일본은 1000명 이상의 군경을 동원했다. 대병력으로 그의 은신처를 포위한 것이다. 1 대 1000의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은 지금의 서울지하철 종로5가역 근처다.

김상옥은 포위망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밀정>에서도 묘사한 것처럼, 그는 효제동 주택가를 돌면서 일본 군경과 시가지 전투를 벌였다. 양손에 권총을 든 채로 무려 세 시간이나 일본 군경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경 16명이 쓰러졌다. 홀로 1000명 이상을 상대하면서 그중 16명을 쓰러뜨렸으니, 그 전투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대역이나 스턴트맨이 나온다 해도 김상옥을 대신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정도면 영화 속 장면보다 실제 장면이 훨씬 더 드라마틱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상옥은 어려서부터 공장 생활을 했다. 그 힘든 대장간에서도 일했다. 거기다가 구한말 종로 거리에서 유행하던 석전, 즉 돌싸움에도 많이 참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경야독으로 공부도 하고 돈도 모았다. 그래서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강인한 사람이었다.

또 김상옥은 직업 군인 출신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총을 잘 다룬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다가 종로구 효제동은 그의 홈그라운드였다.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효제동에서의 1 대 1000 신화가 나왔을 것이다. 

진정한 승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장소. 사진 왼쪽 하단에 표지석이 있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장소. 사진 왼쪽 하단에 표지석이 있다. ⓒ 김종성


<밀정> 초반부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김상옥은 대결 막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총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양손에 권총을 들고 세 시간 동안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휴대했던 실탄이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김상옥이 그 사실을 깨달은 장소는 효제동 72번지였다. 바로 자신의 출생지에서.

그때까지 일본 군경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던 김상옥은 갑자기 총구를 돌려 자기 자신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뻥하는 소리와 함께 효제동 72번지 땅바닥에 쓰러졌다. 1 대 1000의 대결은 그렇게 김상옥의 최종결단에 의해 종결되었다. 서른 네살 청년은 그렇게 고향 땅에 쓰러졌다.

1000명 이상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적의 총에 죽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 전투의 승자는 김상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밀정>의 첫 장면에서 짤막하게 소개된 김상옥은 이렇게 실제로는 훨씬 더 화려하고 멋있게 자신의 최후를 마쳤다.

밀정 김상옥 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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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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