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 포스터

▲ 트루스 포스터 ⓒ (주)라이크 콘텐츠


언론과 언론인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인공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진실을 추적해 알리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굴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스스로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하는 언론의 모습이 비판적으로 비춰질 때도 있지만 그건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을 강조하려는 의도 그 이상은 아니다. 언론과 세상에 대한 희망과 낭만을 간직한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는 건 어땠을까 하고 공상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현대 언론이 처한 우울한 현실을 가감 없이, 때로는 실제보다 더욱 비극적으로 비추는 것이다. 순진한 관객이 기대하는 완전히 신뢰할 만한 언론이란 이 세상에 없음을 까발리고, 과거 수도 없이 이뤄져온 언론의 부패와 비위를 실감나게 재현하는 게 이 같은 작품의 목적이다. 일부 원칙에 충실한 언론인이 등장하고 때로는 낭만적 가치를 간직한 인물도 나오지만,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세계 가운데서 특출한 해법은 제시되지 못한다.

근래 한국서 개봉한 영화 가운데 전자에 해당하는 건 <스포트라이트>, 후자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나 <나이트 크롤러> 정도가 되겠다. 그밖에 언론의 현실을 다룬 영화가 많지만 대개는 이 두 가지 종류 가운데 어느 하나의 길을 걷고 있음이 명백하다. 거칠게 말해 사회를 비판하거나 언론을 비판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1700만이 봐도 모자랄 텐데

트루스 60분 탐사보도팀.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모스, 케이트 블란쳇, 토퍼 그레이스, 데니스 퀘이드가 연기했다.

▲ 트루스 60분 탐사보도팀.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모스, 케이트 블란쳇, 토퍼 그레이스, 데니스 퀘이드가 연기했다. ⓒ (주)라이크 콘텐츠


지난달 24일 개봉해 1만7000여명의 관객을 만난 뒤 대중의 시선에서 빠르게 멀어져가고 있는 <트루스>는 언론을 다룬 많은 영화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기억돼 마땅한 작품이다. 개봉 첫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드물게도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킨 후에, 나는 앞에 적은 것과 같은 두 가지 구분이 더는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불과 2시간여의 러닝타임 동안 앞의 두 가지 구분 사이를 영리하게 오가며 장점만을 취했고 앞서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가 미처 다루지 못한 가치 있는 질문들을 관객에게 묻기까지 했다. <트루스>가 있기 전에 이와 같은 성취를 이룩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CBS의 잘 나가는 프로듀서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 분)다. 그녀는 CBS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메인뉴스 앵커를 맡고 있는 선배 댄 래더(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분'팀을 이끈다.

때는 바야흐로 조지 W. 부시와 존 케리의 2004년 대선을 2개월여 앞둔 시점, CBS 보도국에 새로운 국장이 부임하면서 '60분' 팀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메리는 마음 맞는 팀원과 팀을 꾸려 부시의 병역비리를 고발하는 심층취재를 준비하는데 텍사스 주 방위군에 편법으로 입대, 베트남 파병을 피했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보도국의 전적인 지지를 받으며 메리의 팀은 취재에 착수한다. 그리고 이내 부시의 병역비리 의혹을 입증하는 서류사본과 관계자의 증언을 확보한다. 이를 바탕으로 메리는 더욱 심층적인 취재에 나서려 하지만 CBS 인기 토크쇼에 밀려 마땅한 방송일자를 잡지 못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닷새 남은 빈 시간대에 방송을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처음 보도는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듯하다. 감춰진 진실을 전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열성 기자들의 회심의 펀치가 유력 대선후보 조지 W. 부시의 안면에 적중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전세는 한 번에 역전된다. 한 블로거가 메리가 입수한 서류가 위조라는 증거를 인터넷에 올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이벌 방송사에서 이 사실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메리의 팀은 논란의 중심에 선다.

달을 가리키는 굽은 손가락

트루스 주인공이자 원작자인 메리 메이프스를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 <블루 재스민>, <캐롤>을 거쳐 <트루스>에 이르는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선 연기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고스란히 읽힌다.

▲ 트루스 주인공이자 원작자인 메리 메이프스를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 <블루 재스민>, <캐롤>을 거쳐 <트루스>에 이르는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선 연기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고스란히 읽힌다. ⓒ (주)라이크 콘텐츠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공고한 권력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실을 파헤친 보도팀의 활약상으로부터 보도과정에서 벌어진 문제, 나아가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전면에서 다뤄지는 것이다. 기존엔 정의의 편으로 보였던 메리와 그의 팀은 관객의 판단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뎌지고 중요한 것과 더욱 중요한 것이 한바탕 뒤엉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릴지 모른다. 달을 보려면 손가락은 잊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자의 본래 뜻은 듣지 않고 그 방식만을 문제 삼는 상황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소위 '물타기'라 불리는 일부 언론의 보도행태가 대표적이다.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언론이 나서 그의 손가락을 문제 삼고 이내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손가락의 빛깔이며 형태, 길이 따위의 것들을 재고 따지는 모습, 익숙하지 않은가. 그러다 부러진 손가락을 나는 여럿 기억하고 있다. 요즈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영화라면 바로 이 대목에 집중해 이야기를 끌어갔을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고 진실이 호도되며 위기에 몰린 언론인의 이야기, 얼마나 흥미로운가.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시종일관 진실이 무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메리가 정작 자신의 취재방식에 대해서는 그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 나아가 문제가 그냥 덮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지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저열한 방식으로 취재원을 희생시키는데 동참하는 과정 등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영화는 현대 언론과 언론인이 처한 상황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취재가 그 목적이 지향하는 것만큼 윤리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 앞서 언급한 견월망지의 아이러니와 공적인 업무에 충실할수록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기자의 삶, 소속 기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언론사의 비겁한 태도 등 언급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다양한 질문의 지점을 층층이 쌓아올리다

트루스 CBS 앵커 댄 래더를 연기한 로버트 레드포드. 비상식적인 비난과 함께 <트루스>에 별점 한 개를 준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그의 연기를 "무슈 투소 어워드(밀랍인형 제작자로 알려진 마리 투소에 빗대 비꼰 것)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비꽜지만 언제나 그렇듯 형편 없는 비평가의 비난 만큼 가치 있는 찬사도 없는 법이다.

▲ 트루스 CBS 앵커 댄 래더를 연기한 로버트 레드포드. 비상식적인 비난과 함께 <트루스>에 별점 한 개를 준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그의 연기를 "무슈 투소 어워드(밀랍인형 제작자로 알려진 마리 투소에 빗대 비꼰 것)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비꽜지만 언제나 그렇듯 형편 없는 비평가의 비난 만큼 가치 있는 찬사도 없는 법이다. ⓒ (주)라이크 콘텐츠


상영관을 나오며 현대 언론과 언론인을 이만큼 다양한 층위에서 그려내려 시도한 작품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가 던지려 했던 질문과 비판의 지점들이 연출과 연기의 측면에서 충분히 소화되지 못했다는 인상도 있었지만 시도 자체만으로도 그 도전정신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루스>는 그 자체로 날 선 질문이다. 영화 속 메리가 부시의 병역비리와 관련한 질문을 거듭 던지는 것만큼이나 영화 역시 관객들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달과 손가락이 모두 실재하는 상황에서 굽은 손가락에 문제가 없느냐는 질문은 분명히 유효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기 위해 희생시킨 것들을 돌아보는 과정은 기존 영화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은 부분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이런 영화가 3대 멀티플렉스 가운데 롯데시네마 단 몇 개 관에서만 상영된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오늘 한국의 현실에 이보다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과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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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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