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포스터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포스터. 원작을 훌륭하게 계승한 리메이크가 돋보인다. ⓒ UPI 코리아


주류 상업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주인공이 육체적으로 활동적이어야 하는 모험이나 액션물 같은 장르에서 더 그렇습니다. 주인공은 당연히 남성이고, 여성은 그의 조력자이거나 구원받아야 할 대상에 그칩니다. 남자의 앞길을 훼방 놓는 팜파탈이나 호적수로 등장하는 건 그나마 나은 대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1984년판 원작은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주인공 데이나(시고니 위버)는 여성이 상업 영화에서 대상화 되는 방식을 다양하게 경험합니다. 피터(빌 머레이)의 밑도 끝도 없는 추근거림을 받아 줘야 하고, 귀신들린 팜파탈이 되어 영화 속의 위기를 몰고 오며, 결국 무고한 희생자로서 남성에게 구원받기까지 하니까요.

원작의 전체 이야기는 유령 잡는 SF 액션 코미디이지만, 여자(데이나)에 대한 남자(피터)의 노골적인 작업이 성공을 거둔다는 식의 서브 플롯이 아주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엔딩에 나오는 피터와 데이나의 키스는 뜬금없는 설정이 아니라, 아주 논리적인 결말인 겁니다.

이번 리메이크판이 파고든 지점도 바로 이런 문제들입니다. 크리스틴 위그가 각본을 쓴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2011)으로 주목 받은 이후, 멜리사 맥카시와 함께 여성 중심의 액션 코미디 영화 <더 히트>(2013, 국내 미개봉)와 <스파이>(2015)를 만들어 연달아 히트시킨 감독 폴 페이그는, <더 히트>의 시나리오 작가 케이티 디폴드와 함께 이 유명한 원작을 여성 중심의 서사로 바꿔 버렸습니다.

원작의 성차별적 요소를 캐릭터의 성 역할 바꾸기를 통해 뒤집고, 비슷한 줄거리를 따라 가면서도 여성 주인공에 맞는 설정들을 추가한 영화를 만든 것이죠. 이 과정에서 실제로 여성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원작의 성차별적 요소 뒤집기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한 장면. 1984년판 원작과는 달리 여성 유령 사냥꾼을 내세운 작품이다.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한 장면. 1984년판 원작과는 달리 여성 유령 사냥꾼을 내세운 작품이다. ⓒ UPI 코리아


그래서 이번 영화의 주인공들은 원작의 남성 주인공들이라면 절대 겪지 않았을 일들을 당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구설수에 올라도 괜찮은 직장을 포기해야 되고, 배달 음식은 한 번도 제대로 배달되지 않으며, 공식적으로 유령 사냥꾼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름 없는 영웅'의 지위에 만족해야 합니다. 선배 캐릭터들보다 훨씬 과학자답게 처신하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나지만, 원작에서처럼 유령 퇴치 사업이 너무 잘 되어서 밤잠을 설치거나 사람들의 환호와 격려 속에 유령과 맞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지요.

특히 접수원 케빈(크리스 햄스워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전형, 즉 '머리 나쁜 육체파 금발 여비서' 역할을 그대로 남성에게 되돌려 주자는 발상에서 비롯된 캐릭터로서, 이제까지 할리우드가 여성을 다뤄 온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유령 사냥꾼이 된 4명의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개성을 듬뿍 담아 맛깔스러운 연기를 보여 줍니다. 자연스런 연기와 웃기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순발력이 돋보이는 크리스틴 위그나,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거친 태도와 입담으로 배꼽잡게 만드는 멜리사 맥카시는 자신들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극을 이끌어 갑니다. 케이트 맥키넌은 걸 크러쉬를 부르는 멋진 스타일과 춤으로, 유일한 흑인 대원인 레슬리 존스는 특유의 터프함이 두 사람을 뒷받침 하지요.

원작의 중요한 서브 플롯이 여자 꼬시기였다면, 이번 리메이크에서는 주위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믿게 되는 성장의 모티브가 중요합니다. 누가 알아 주지 않아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며 서로 연대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들이 다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한 장면.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다양한 액션 신을 선보이지만, 액션 자체의 쾌감보다는 배우들이 싸우는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게 만드는 식으로 연출된 탓에 다소 늘어지는 편이다.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한 장면.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다양한 액션 신을 선보이지만, 액션 자체의 쾌감보다는 배우들이 싸우는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게 만드는 식으로 연출된 탓에 다소 늘어지는 편이다. ⓒ UPI 코리아


좀 아쉬운 것은 공들여 찍은 액션신들과 특수 효과 장면들이 전체적인 밸런스를 깨뜨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액션 자체의 쾌감보다는 주인공들 네 명이 유령을 물리치는 과정을 재미나게 보여 주는데 신경 쓰다 보니, 속도감이 떨어지면서 이전까지 유지돼 왔던 리듬이 흐트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들처럼 주인공이 한 명이나 두 명이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네 명을 골고루 다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립니다.

새로운 <고스트버스터즈>는 미국에서 개봉 직전 최대 영화 사이트인 IMDB(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에서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주인공들 중 한 명인 레슬리 존스가 트위터에서 무지막지한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원작을 여성 시점으로 패러디했다는 사실 자체를 안 좋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벌인 짓들이지요.

그런 남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굳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이런 명작 영화까지 이렇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 도대체 얼마나 더 여성 중심적이기를 원하느냐?'라고요.

하지만 이 영화는 여자들이 다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저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권리를 남성과 똑같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원하는 만큼만요. 에필로그에서 멜리사 맥카시가 평소와 달리 완탕을 너무 많이 가져 온 중국 음식 배달원을 나무라는 장면은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스트버스터즈 폴 페이그 멜리사 맥카시 크리스틴 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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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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