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범죄 조직의 여왕 또는 최종 보스의 느낌이 풍긴다. 그러나 <범죄의 여왕>은 암흑가의 두목과 거리가 멀다. 영화는 고시생 아들 익수(김대현 분)가 사는 고시원에 수도요금이 120만 원이 나오자 엄마 미경(박지영 분)이 관리사무실 직원 개태(조복래 분), 고시 전문가 덕구(백수장 분), 24시간 게임 폐인 진숙(이솜 분) 등의 도움을 받아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렸다.

하드보일러 범죄스릴러, 여배우에겐 단비

 주인공 그녀는 화려한 색감의 원피스를 입고, 빨간 하이힐을 신어 고시원과 다른 색감을 가진다.

주인공 그녀는 화려한 색감의 원피스를 입고, 빨간 하이힐을 신어 고시원과 다른 색감을 가진다. ⓒ 콘텐츠판다


전개만 본다면 '범죄의 여왕'보단 '추리의 여왕'이 어울릴 법한 내용이 아닌가. 역설적인 제목은 제작사 광화문시네마의 대표인 김태곤 감독이 지었다. 영국 여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별명이 '범죄의 여왕'이란 점에 착안했다고 한다.

연출을 맡은 이요섭 감독은 "보통 영화에서 엄마 또는 아줌마라는 캐릭터가 모성애만을 강조한 것으로 그려져서 아쉬웠다. 그래서 <범죄의 여왕>을 통해 이들이 여자였던 순간과 우리 엄마도 멋있을 때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영화는 미경을 주인공으로 삼아 하드보일드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범죄 스릴러를 내세운다. 그리고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던 엄마(또는 아줌마)의 스테레오 타입을 과감히 깨버린다.

추리와 코미디를 버무린 <범죄의 여왕>은 주연 배우 박지영을 활용하여 참신함을 길어 올린다. 현재 대부분 한국 영화는 남자 배우가 중심이다. 여자 배우, 나아가 중년 여성이 가족드라마나 멜로가 아닌 장르에서 주연으로 나서긴 실로 어렵다. 박지영 배우도 "아줌마가 주인공이라 무조건 하기로 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여자 배우에게 주어지는 시나리오의 폭은 좁다. <범죄의 여왕>의 미경은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이영애 분),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김복남(서영희 분), <마더>의 어머니(김혜자 분), <비밀은 없다>의 김연홍(손예진 분)처럼 한국 영화에 내린 단비 같은 존재다.

이 영화, 개성 있는 구성요소 많아

 박지영 외에 조복래도 출연한다.

박지영 외에 조복래도 출연한다. ⓒ 콘텐츠판다


TV 드라마 <장녹수>와 <토지>, 영화 <하녀>와 <후궁: 제왕의 첩>에서 뛰어난 표현력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보여주었던 배우 박지영은 이번에도 연기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들에게 "엄마 끝장 보는 성격인 거 알지. 2일 안에 해결할게."라고 큰소리치고 넉살 좋은 성격과 남다른 촉을 내세워 사건을 조사하는 미경에겐 강인함과 능청스러움이 엿보인다. 또한, 개태를 위해 밥을 해주는 장면이나 "넌 왜 그렇게 휴지를 많이 쓰니?"라고 타박하는 모습에선 어머니의 따스함과 알면서 그러는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는 황당함이 교차한다.

불안과 좌절이 팽배한 고시촌에 미경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익숙한 '스텝프린팅(저속촬영 후 필름의 특정한 부분을 복사해 붙이는 방법으로 비현실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영화기법)'을 활용하여 존재감을 강조한다. 그녀는 화려한 색감의 원피스를 입고, 빨간 하이힐을 신어 어두운 고시원과 다른 색감을 가진다. 공간과 대비적인 느낌을 지닌 미경은 아들 익수와 유사 아들 관계를 형성하는 개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범죄의 여왕>은 범죄 스릴러의 색깔을 지녔지만, 그 밑엔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로움이 위치한다.

<범죄의 여왕>의 다른 주인공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고시촌'이란 공간이다. 수천 명의 사람이 합격이란 동아줄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일상의 영역이나 사회와 철저히 고립된 지역, 누구나 알지만 접하기는 힘든 공간이 고시촌이다. 그곳에서 청춘을 보내고 현재 부장 판사로 일하는 문유석은 "예전보다 많이 해사해졌지만 이 동네의 본질은 변할 리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 초조, 욕심, 좌절, 분노, 비뚤어진 욕망, 충족되지 않는 자존감, 과대망상, 성욕, 찌질함, 고시촌의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관련기사: 경향신문 [정수복의 도시를 걷다]신림동 고시촌의 밤)라고 술회했다. 그의 표현대로 고시촌은 다양한 심리가 용광로처럼 녹아 있는 기이한 장소다.

영화는 고시촌의 거리, 자습실, 식당, PC방 등 다양한 풍경을 포착한다. 가장 공을 기울인 공간은 주요 무대인 고시원이다. 이효재 촬영 감독과 김보현 조명 감독은 인물과 상황에 어울리는 조명과 필터를 사용하여 장르적인 느낌을 내고 캐릭터를 표현했다. 방길성 미술감독은 인물의 성격을 반영한 구성을 통해 개성을 드러냈다. 이렇게 조형된 고시원 세트장이 주는 정서엔 <소름>에 버금가는 이상함이 흐르고 있다.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작품

 <범죄의 여왕>이 지난 25일 개봉했다.

<범죄의 여왕>이 지난 25일 개봉했다. ⓒ 콘텐츠판다


<범죄의 여왕>은 '광화문시네마'가 제작한 작품이다. 광화문시네마는 김태곤, 이요섭, 권오광, 우문기, 전고운 감독과 김지훈, 김보희 프로듀서가 만든 영화창작집단이다. 현재 광화문시네마는 대형투자배급사가 시장을 주도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제작 방식도 눈길을 끌지만, 우리네 청춘의 눈높이에서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는 자세도 흥미롭다. 첫 작품 <1999, 면회>는 IMF 시기를 관통한 20대 초중반의 얼굴을 청춘 영화의 틀에 담았다. 다음 작품인 <족구왕>은 낭만이 사라진 자리를 스펙이 대신하는 대학가의 현주소를 스포츠 영화의 손길로 꼬집었다. <범죄의 여왕>은 대학을 졸업한 자들이 매달리는 고시의 풍경을 건드린다. 이렇듯 광화문 시네마는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웃음기로 다루지만, 그 속엔 현실의 주름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청춘과 사회의 관계맺기에 주목하는 광화문시네마. 이들의 영화를 유심히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광화문시네마는 엔딩크레딧에 차기작을 담은 쿠키 영상을 보여주는 전통이 있다. 이번에도 영화가 끝나면 차기작 <소공녀: 현대판 거지>의 쿠키 영상이 이어진다. 동화에서 제목을 가져왔으나 내용은 완전히 딴판. 담배를 즐기던 여성이 담뱃값 인상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는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다.
범죄의 여왕 박지영 조복래 김대현 이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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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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