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그 거짓말이라는 '말'이 자신까지 속이려 든다. 그래서 조지 버나드 쇼는, 거짓말쟁이의 가장 큰 벌은 다른 사람의 신뢰를 잃는 것보다 스스로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는 '슬픔'을 강조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약한지라, 선의의 거짓말을, 백의의 거짓말을 믿고 또 믿으려 든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예리가 주연이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예리가 주연이다. ⓒ CGV아트하우스


그렇다면 '진짜'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와 그에 수반돼야 하는 '진심' 역시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 같은 것 아닐까. 같은 듯 다른 맥락에서, 스스로가 '진짜'라고 설득돼야만 '진심'이 발동하는 이기적이고도 오묘한 인간심리는 어떠한가. '진짜'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순간에 내 '진심'이 찾아와 버리는 요지경 같은 삶과 관계의 찰라들을, 우리는 종종 목도하지 않았던가. 

각본까지 쓴 전작 <조금만 더 가까이>(2010)를 통해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진한 감수성과 여운을 전했던 김종관 감독. 그의 신작인 <최악의 하루>는 '단 하루 동안 일어나는' 영화적인 사건 속에 이러한 질문들을 곳곳에 숨겨 놓은 수작이다. 물론 그 외피엔 여전히 사랑과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남녀의 만남과 로맨스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서촌'이란 공간을 닮은 듯, 친숙하게 다가와 범상치 않은 여운을 남긴다.

힘을 내요, 우리 은희씨!

 인간 본연과 관계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김종관 감독의 시선이 돋보인다.

인간 본연과 관계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김종관 감독의 시선이 돋보인다. ⓒ CGV아트하우스


최악의 하루를 맞는 오늘의 주인공은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 분)다. 선배에게 '진짜 연기'에 대한 핀잔을 들은 은희는 연기 수업을 마치고선 서촌에서 길을 헤매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 분)와 낯설 지만 싫지 않은 만남과 대화를 가진다. 우연이라면 우연, 운명이라면 운명.

그리고선 남산. 은희는 '현남친'인 배우 현오(권율 분)를 만나기 위해 남산타워를 올려다보며 택시를 타고선 남산 산책길에 도착한다. 아침드라마에 출연 중인 현오는 한껏 배우임을 뽐내는 듯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후드티셔츠에 달린 모자까지 장착하고는 은희와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그 시각, 앞서 은희가 현오를 기다리며 적어 올린 트위터를 발견하고선, 은희와 만난 적 있던 남자 운철(이희준 분)이 남산에 도착한다. 지금 만나는 남자, 만난 적 있는 남자, 그리고 우연히 만난 남자와의 기기묘묘한 하루 동안. 이 한 줄 요약은 누군가에게는 흥미롭고, 누군가에게는 소소하게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맞다.

실제로, 현오의 은근한 남성적이거나 직업에서 오는 철없음은 종종 헛웃음을 주고, "전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말하는 운철의 그 속물성과 이기심, 백치미가 섞인 전형적인 '한국 남자스러움'(?) 남녀 관객 모두에게 허를 내두르게 한다. 그리고 은희가 우연과 의지가 섞인 상황 속에서 때때로 거짓과 진심, 사실과 진실을 섞어 가며 이 둘과의 한나절을 방어해 나가는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최악의 하루>의 가장 극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묘사가 자연스러운 것은 온전히 은희라는 인물에서 비롯한 '여성적 관점'이라기보다 인간 본연과 관계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김종관 감독의 시선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갈하고 리드미컬한 촬영과 편집을 수반한 영화의 형식과 함께. 그러나 여기까지는, <최악의 하루>가 보여주는 진실의 절반이다.

의심치 말지어다, <최악의 하루>와 닮은 우리네 삶을

 거짓 같은 진짜와 마주해야 하는 료헤이와 선의의 거짓말을 더하면서까지 스스로에게 진심을 강요해야 하는 은희의 모습이다.

거짓 같은 진짜와 마주해야 하는 료헤이와 선의의 거짓말을 더하면서까지 스스로에게 진심을 강요해야 하는 은희의 모습이다. ⓒ CGV아트하우스


사실 <최악의 하루>는 절반 가까이를 은희가 처음 만난 료헤이의 하루로 포개 놓는다. 물론 료헤이가 접하는 하루 역시 진짜와 진심, 거짓말 등의 연속이다. 당황스럽게 하는 출판사 사장의 진심어린 선의의 거짓말, 황당하지만 료헤이가 직면해야 하는 황당한 팬 미팅, 그리고 팬을 자처하며 만난 한 여성 기자와의 당혹스러운 대면까지.

차이가 있다면, 료헤이는 이 가짜 같은 진짜 상황을 담백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리리라. 그것은 김종관 감독이 창조한 료헤이의 성격에 기반하지만, 이에 더해 이방인에게는 낯선 언어와 낯선 공간이라는 환경의 차이이기도 하다. 거짓 같은 진짜와 마주해야 하는 료헤이와 선의의 거짓말을 더하면서까지 스스로에게 진심을 강요해야 하는 은희. 

그리하여 은희가 "진짜가 무엇일까요. 전 그 모든 게 진심이었는데"라고 료헤이에게 발성 할 때, 우리는 은희의 진심을 믿을 수밖에 없어진다. 결국 우리 역시 때때로 거짓말도 하고, 진심도 아닌 상황의 연쇄로 채워진 하루를 살아 내듯이. 그리하여 그 하루를 돌아 봤을 때, 대부분이 진심이었다고 자위하듯이. "진실이 어떻게 진심을 이겨요?"라는 운철의 물음과는 달리, 그 진심이 삶의 진실이라고 <최악의 하루>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하루>는 여기에 (실제 서촌 주민인 김종관 감독이 본)서촌이라는 공간의 아름다움을 마법처럼 그리는 동시에 배우들의 매력을 한껏 끌어 올린 영화이기도 하다. 한예리라는 배우가 가장 아름답게 그려진 영화 중 한 편이기도 하면서,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이와세 료는 물론 특별출연한 이희준의 짧지만 강렬한 연기력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더불어 몇몇 조연들의 한 장면 한 장면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의심치 말지어다. 쇼펜하우어는 거짓말쟁이를 그대로 두면 그 불어난 거짓말로 인해 스스로 정체를 폭로할 거라 했지만, 그 거짓말까지도 삶의, 그 사람의 일부라는 것을. 그것이 진심과는 궤를 달리하는 또 다른 진실이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도 은희처럼 하루하루를 살아 내고 있지 않은가.

최악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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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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