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 코믹극 <조용한 가족>(1998), 애잔한 공포 <장화, 홍련>(2003) 등 김지운 감독은 늘 장르 변주의 대가로 한국 영화계에 자리매김해왔다. 늘 자신만의 인장을 영화에 찍으며 최근엔 할리우드와 손을 잡고 <라스트 스탠드>를 선보이며 자신의 지평을 한 번 더 넓히기도 했다.

그가 3년 만에 시대극 <밀정>으로 돌아왔다. 한국 배우와 스태프로 오롯이 작업한 걸로 따지면 <악마를 보았다>(2010) 이후 6년 만이다. 25일 오후 서울 왕십리 CGV에서 언론에 선 공개된 <밀정>에도 김지운 특유의 역설 화법과 이야기 변주가 담겼을까.

달라진 김지운 감독의 고백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활약을 소재로 했다. 김지운 감독이 <라스트 스탠드>에 이어 3년 만에 선보이는 영화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결론부터 말하면 다르다. 애초 송강호, 공유, 한지민 등이 합류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제작사 워너브러더스의 투자를 받으며 올 상반기를 마무리 하는 기대작으로 꼽혀왔다. 최근 들어 한국영화에 종종 등장해온 일제강점기 시대를 그가 어떻게 다뤘을지 궁금증이 커질 무렵 김지운 감독은 "한국 스파이 영화, 콜드 느와르 장르를 한국에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런데 막상 공개된 영화는 뜨거웠다. 조선인 일본 경찰로 출세한 이정출 역의 송강호가 치밀하게 의열단원들을 쫓았고, 의열단 핵심 인물 김우진(공유 분)이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임무를 수행한다. 캐릭터들이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가득 차 마치 폭발할 것만 같았다. 결국 영화는 냉정하게 거리를 둔 채 인물을 쫓아가는 느와르가 아닌 비극의 시대에서 양심과 사람의 본분을 고민한 청춘들의 고뇌를 녹여내는 용광로가 돼 버렸다.

그래서 실패한 영화인가. 그 반대다. 애초 <밀정>은 냉정함이라는 덕목과는 태생적으로 가까울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남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단순히 세계 패권을 쥐고 서로를 파멸시키고자 했던 서구 냉전 국가가 아닌, 제국주의의 지배를 당한 약소국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때문에 김지운 감독 특유의 차가운 액션과 느와르가 가능할 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언론 시사 직후 김지운 감독 역시 "영화를 만들며 점점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며 "벼랑 끝에 서서 희망을 얘기하는데 어느새 나의 자의식을 내려놓고 영화와 인물이 가려는 방향을 내밀하게 쫓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르성과 어떤 스타일에 규정받지 않고 살아있는 이야기와 인물을 그대로 묘사한 첫 번째 작품이 됐다. 

기꺼이 밀정이 된 그들, 밀정이 될 수밖에 없던 그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화는 일본에 항거해 무장독립운동을 이어간 의열단원과 이들을 척살하려는 일제 세력 간 대결을 그리면서 그 핵심 캐릭터로 여러 밀정들을 묘사한다. 곧 서로를 감시하려는 밀정의 수 싸움이 영화적 묘미로 남을 수 있겠다. 실제 의열단원이면서 일본 경찰이기도 한 이중 스파이 황옥 등을 모티브로 새로운 가상 인물들을 적소에 배치했다.

크게는 의열단을 소탕하려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히가시(츠루미 신고 분)와 또 다른 조선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 분)와의 대결구도가 보이지만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의열단의 새리더로 떠오른 김우진과 유일한 여성단원 연계순(한지민 분),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여러 단원들 개인의 고뇌와 변화를 포착한다. 

따라서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함께 인물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는 게 <밀정>을 즐기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된다. 캐릭터들이 소모적으로 쓰였다면 별 소득이 없는 위험한 시도일 수 있지만 김지운 감독 이하 배우들은 자신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왜 이 영화를 찍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영화 <밀정>의 하시모토(엄태구) 역시 조선인 일본 경찰이다. 그가 왜 그토록 독립운동가들을 잡는지 영화에선 자세히 설명되진 않는다. 다만 김지운 감독은 "편집된 부분이 있다"며 전체 상영 시간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배우에게 미안했다"고 말했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송강호의 뼈 있는 말이 <밀정>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저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자리에서 송강호는 "아픈 시대를 관통했던 많은 분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의 갈등과 고뇌가 이 영화의 독창성"이라며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목숨을 잃은 분들에 대한 죄송함이 <밀정>을 대표하는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투철한 애국심을 가져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흔들리는 게 바로 사람이다. <밀정>은 그 부분을 부각시키며 인간의 비겁함과 나약함, 나아가 시스템을 잃어버린 국가의 비참함을 직유법으로 드러낸다. 애써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나 밀정이 될 수 있고, 또 삶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그런 모습을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밀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삶의 치열함을 얘기한다고 볼 수 있겠죠." (송강호)

"국가가 불안할 때 개인의 존립마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상징이 영화에 담겨있습니다. 영화는 밀정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밀정이 될 수밖에 없던 시대의 질곡을 담으려 했습니다.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선택을 할 테고 그게 과오일지라도 결국 자신의 본령을 찾을 수도 있다는 걸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김지운 감독) 

치열한 내면 갈등과 시대적 비극의 대비로 영화는 극적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만 다른 노선을 택했다. 이것이 시나리오의 한계로 다가갈지 절제의 미덕으로 다가갈지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적어도 분명한 건 내밀하고 촘촘한 경계인의 삶을 진심으로 쫓으려 한 김지운 감독이 모처럼 성공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영화 <밀정> 포스터.

송강호가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로 의열단원인 김우진(공유), 연계순(한지민) 등을 쫓는다. 빠른 액션도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내밀한 심리 변화를 추적한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한 줄 평 : 일제강점기 시대극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평점 : ★★★★ (4/5)

영화 <밀정> 관련 정보


감독 : 김지운
출연 :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츠르무 신고, 신성록, 이병헌, 박희순 등
제공 : 워너브러더스 픽쳐스
배급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 : 영화사 그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공동제작 : 영화사 하얼빈
크랭크인 : 2015년 10월 22일
크랭크업 : 2016년 3월 31일
러닝타임 : 140분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 2016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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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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