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을 밟았던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모두 예상치 못한 사고의 결과. "참, 이상하죠? 주변에 이런 사연을 지닌 친구가 많아요"라며 살짝 웃어 보이는 이현정 감독이야 말로 참 이상하다. 물론 그가 아닌, 그의 영화 이야기다. 

지난 6월 개봉한 <삼례>(Night Song), 거슬러 올라가면 <용문>(2013)과 <원시림>(2012)이 그가 지금껏 선보인 작품들이다. 그나마 근작 <삼례>가 2015년 전주국제영화제 출품 이후 개봉을 위해 재편집 과정을 거쳐 다소 관객에 친절해졌지만, 앞선 두 작품은 다분히 실험성이 강하다. '괴작'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단순히 비이성적이라는 이유로 영화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는 법. 그의 작품 속 중심은 늘 여성이었다. 단순히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어서 특별한 게 아니라, 여성을 대하고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현정 감독은 특별했다. '같은 여성'이라서가 아니다. "비이성과 비합리에 그리고 거대한 무의식 속에 진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든 것도 무의식을 경험한 이들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오마이스타>는 바로 그의 색다른 여성주의,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에 주목했다.

여성이 주인공인 게 불편해?

 영화<삼례>의 이현정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삼례>의 문법은 독특하다. 이야기에 집중할라 치면 등장하는 우주 이미지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무속인 등이 신비감을 더한다. 여성, 종교, 나아가 과학 분야에까지 이현정 감독은 관심이 많았다. ⓒ 이정민


삼례는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한 마을이다. 특정 사건과의 관련성이나 특별한 상징이 없어 보이지만 120여 년 전 동학 농민 혁명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던 곳이 삼례다. 그 중심엔 이소사라는 여성이 있었다. 사실 소사가 본명이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단 몇 줄의 기록과 일본신문의 짧은 기사만이 그에 대해 전하고 있기 때문.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했으며, 장흥부가 함락돼 불타고 있을 때 말 위에서 사람들을 지휘했다' 등이다.

영화는 '희한한 인간'이라는 속뜻을 지닌 희인(김보라 분)과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삼례를 방문한 승우(이선호 분)의 관계를 통해 원초적 감정을 파고든다. 도시사람이 외지에 발을 디뎠을 때 느끼는 낯섦일 수도 있고,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려는 시골사람의 욕망일 수도 있다. 여기에 감독은 영화 사이사이에 '코스믹 아이'(Cosmic Eye) 즉, 우주 성운 이미지를 넣어 시공간 배경을 모호하게 만든다. 희인의 전생이 곧 이소사였고, 승우는 소사를 지키려던 사람이었다.

 영화 <삼례>의 포스터. <삼례>는 마치 예술영화계의 <곡성> 같은 작품이다.

영화 <삼례>의 포스터. ⓒ 인디플러그


"희인은 곧 개성이 죽지 않은 독특한 사람을 뜻한다. 누군가는 그걸 희한하다고 하지 않나.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말이다. 승우는 현대인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 초상이다. 서울 사람이며 아는 것도 많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이질적인 경험을 하거나 낯선 상황에 부딪히면 소극적이 되고 어쩔 줄 몰라 하곤 한다. 반면 날 것이나 거친 일을 당한 사람들은 대응이 빠른 편이고.

말씀하신대로 여성주의가 제겐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 드러내놓고 여성주의적인 영화를 불편해 하시는 분이 우리나라엔 많더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에서 소녀가 대의를 위한 선봉에 섰다면 누구를 떠올릴까. 아마 유관순을 많이 생각하시겠지만 삼일절 운동은 한 번에 확 붙은 일이다. 반면 동학은 오랫동안 내려온 것이지 않나. (소사는) 긴 시간 동안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왔을 거다. 역사 속 그 한 줄 기록이 사그라지지 않길 원했다.

영화 전체가 될 순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그가 영화를 차지하길 원했다. 그런 여성이 있었다는 걸 아는 후대와 모르는 후대는 차이가 클 것이다.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린 여성을 대상화 하지 않았나. 폭력의 피해자로 그리고, 두려움도 많은 존재로 그렸다. 무의식에 자꾸 스며드는 그런 생각을 경계하고 과거 역사에 실제 이런 여성이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

영화의 영어제목이 '나이트 송'(Night Song)인 건 이성적으로 <삼례>를 다 이해할 순 없어도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기억되길 원해서였다. 남자는 정리하길 원하고 분석하려 한다. 종종 '한 마디로 말해 봐!' 이러지 않나(웃음). 여자는 정황과 심리에서 소통을 시작한다.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여자의 언어라는 게 있는 셈이다. 분위기와 감정을 기억하는 게 여성이다. 그런 의미로 <삼례>에서 비이성적 요소를 활용한 거고, 여성적인 소통을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드러난다고 무조건 여성주의가 아니듯이."

'알파걸'도 한국에선 발언권 없는 작은 존재

 영화<삼례>의 이현정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성이 영화 전면에 등장한다고 해서 여성주의 영화인 건 아니다" 이현정 감독은 캐릭터나 분량이 아닌 화법에서 여성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 이정민


그리고 <용문>과 <원시림>이 있다. 이현정 감독은 <용문> 속에 등장하는 '콜걸'과도 같은 여성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려 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그렸다. 다큐멘터리인 <원시림>을 통해선 다름 아닌 이 감독의 외할머니 장례식을 가감 없이 제시하며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한국 사회 속 여성의 진짜 위치를 가늠했다. 다만 두 작품 역시 이 감독 특유의 낯설게 하기가 드러난다. <용문>에선 인물들이 일상 언어가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서로에게 내뱉는다. <원시림>에선 감독이 직접 영화에 등장해 할머니의 무덤을 꽃으로 수북하게 덮는 일탈 행동을 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절 외할머니 댁에 보내셔서 거기서 크다시피 했다. 나만 유일한 외손녀였고, 가까이 지냈으니 외할머니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있었지. 장례식 때 나보다 어린 친척들이 할머니 묏자리에 대해 회의하는데 정작 난 여자라 발언권이 없었다. 당신은 선산에 묻히고 싶다 하셨는데 자꾸 다른 곳에 묻으려 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그 사회 속 여성 지위는 관혼상제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한국에선 아무리 '알파걸'(남성보다 뛰어난 리더십, 사회적 지위 등을 가진 여성)이라도 결혼식 혹은 장례식에서 남녀 차별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딱 조용필의 '단발머리'라는 노래가 나오더라.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아시지 않나!(웃음) 우리에겐 할머니지만 당신도 분명 소녀였을 테고 돌아가실 때 당신의 십대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할머니는 소녀였는데 우린 그걸 생각하지 못한다. 그 소녀에게 꽃다발을 안기는 게 바로 <원시림>이라는 작품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 이현정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그가 경험했던 산과 들, 이런 자연이 지금 영화들의 재료기도 했다. 그러니까 개발의 광풍으로 물질 만능주의로 그 가치가 떨어져 버린 인간과 쉽게 사라져버리는 자연을 그는 카메라에 오롯이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날 것을 그대로 담고 싶다"며 이현정 감독은 <삼례>에 등장하는 가수 강산에의 예를 들었다. "실제 그 분 가족사기도 한 노래 '라구요'를 직접 부르셨다"며 "영제인 <나이트 송>과도 연결고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열악한 현장 조건에 강산에는 밤새 자신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이현정 감독이 "촬영 일정이 밀려서 엄청 길게 대기하셨는데 그때 너무나 죄송했다"던 뒷이야기는 이젠 추억처럼 남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및 이집트인들은 별의 운동을 보며 지구인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았고, 자연 아래 인간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깨달았다. 별을 보며 상상했던 이 세상이 어쩌면 지금보다 더 아름답진 않았을지. 이현정 감독이 <삼례>에 우주적 이미지를 차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음력의 예를 들며 이 감독은 "영화 속에서 뭔가 허를 쿡쿡 찔러드리고 싶었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영화<삼례>의 이현정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삼례>엔 가수 강산에를 비롯해 개그맨 김현철도 등장한다. 날 것 같은 느낌과 진실성을 위해 이현정 감독은 두 사람에게 출연을 부탁했고, 흔쾌히 응했다. 자신의 가족사이기도 한 노래 '라구요'를 강산에가 직접 부르는 장면, 웃음기를 뺀 채 정극 연기를 보이는 김현철의 모습 또한 <삼례>의 감상 포인트다. ⓒ 이정민


"태양이 남성이라면 달은 여성적이잖나. 또 양력은 확실하고 합리적인 사고, 음력은 일종의 비이성이자 광기일 수 있다. 하지만 우주적으로 보면 분명 이것도 질서 중 하나일 거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나 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잖나. 통증이 꼭 밤이면 심해지는 것, 임신한 여성도 진통이 대부분 밤에 시작되는 것 등이 바로 삶의 리듬의 일부다.

작은 관심이라도 쏟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와 과학이 영화 속 이야기와 동떨어진 게 아니다. 이젠 별 사이 거리 계산도 되고 우주선을 더 멀리 보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어쩌면 지금이 더 우주적인지도 모른다. 근데 알면 알수록 어떤가? 더 겸허해지는 거 같다. 시간을 와해시키면서 동시에 공간을 와해시킬 수도 있는데 <삼례>에서 (두 인물의 전생 묘사를 위해) 그걸 해보고 싶었다."  

<삼례>의 몽환적 분위기는 바로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이현정 감독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를 봤다고 생각하시기 보단 저마다 자기 경험을 대응해볼 수 있는 작품이길 원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획일적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 어쩌면 이현정 감독이 걸어온 길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신학 전공자에서 뉴스 보도국 기자로 일하던 4년의 시간, 그러다 돌연 실험영화와 설치 미술의 세계로 들어온 그다. <삼례>의 상영이 거의 끝난 시점에 그는 서울 미아리 텍사스촌(과거 홍등가로 불리던 지역)에서 설치 전시를 가질 예정이다.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있다. 이러다 한 번 더 우리 이성의 범주를 벗어난 작품을 들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을 많이 산 것도 아니지만 그대로 보면 계획적으로 잘 하시는 분과 우연에 의해 변하는 분도 있다. 난 후자 쪽인 거 같다. 그래서 내 영화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다. 우연의 힘을 믿는 편이다.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면 물론 그대로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경우가 많더라. 대학교 동아리 선배를 보다 기자가 됐고, 취직한 곳에서 우연히 카메라와 편집을 배우다가 이 일을 하게 됐다. 신학을 전공한 것도 영화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다른 일보다 영화는 내가 괴로워하지 않고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영화<삼례>의 이현정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학에서 영화까지. 말 그대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이현정 감독은 "이 모든 게 내가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다"며 "우연의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거 같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그가 제안한 연예뉴스는 어떤 모습일까. ⓒ 이정민


이현정 감독이 제안한 연예 문화 뉴스, "쫓지 말고 제안하세요!"
신학도, 방송 기자, 설치 미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다뤄온 이현정 감독은 매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즉 콘텐츠를 전달하는 해당 매체의 성격에 신경을 쏟는다는 말이다. 그는 "상영관이 어떤 곳인지 혹은 휴대폰에서만 보일 것인지에 따라 음향과 색감이 달라진다"며 "기사를 쓸 때도 그것이 어떤 매체를 통해 전달될 것인지를 미리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소모적 가십 일색인 연예 문화 뉴스 분야에 대한 이현정 감독의 제언이다.

"영화도 매체에 따라 음향과 색감이 달라져요. 플랫폼에 따라 기술을 고려하는 거죠. 매체는 꾸준히 기술적으로 발전했지만 콘텐츠는 제자리인 거 같아요. 플랫폼을 따라가기 급급해 보인다랄까. 이젠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미리 제안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국가에서도 콘텐츠를 하도 강조해서 다들 관심은 많은데 플랫폼에 대한 대비나 분석은 없어 보여요. 보면 증강현실이다 뭐다 여러 플랫폼이 나오잖아요.

각 플랫폼에 적합한 콘텐츠는 뭘까요. 그걸 알기 위해선 플랫폼에 대한 이해가 우선 있어야 한다고 봐요. 플랫폼에 따라 우리 의식에도 영향을 주거든요. TV도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면서 사람들 의식이 변했고,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필름 영화와 디지털 영화가 또 다르죠. 이렇게 그릇이 점점 바뀌는 만큼 함께 그걸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좀 더 나아가서 먼저 그런 플랫폼에 대한 제안도 해주면 어떨까요.


이현정 삼례 VR 동학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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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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