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싶게 가슴을 톡, 톡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 '맞아 이런 생각했었는데' 싶은 말들을 속삭여준다. 차마 문장으로 완성하지 못한 감정의 형체를 만들고 색을 입힌다. 내겐 소설가 김애란이 그렇고, 드라마 <청춘시대>가 그렇다.

하나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를 첫방부터 사수한 '진성' 시청자는 아니다. 밀린 10회를 지난 이틀간 정주행했다. 처음에 드라마를 외면한 이유는 분명했다. 예고 때문이다. '여대생 밀착 동거담'이라는 수식어가 화면에 등장하면서부터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 수식어를 보고 끌린 시청자가 있는지 진심 궁금하다.) '여대생'이라는 키워드를 팔아서 장사해보려는 심산으로 읽혔다. (이런 면에서 <청춘시대>의 사전 홍보는 실패라 할 정도로 아쉽다.)

그러다 우연히 '재미있다'는 입소문을 들었고, 단숨에 밀린 방송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입소문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1%대의 시청률을 맴돌고 있다. (<굿와이프>와 맞붙은 운 나쁜 대진표는 더이상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더해 이번주면 12부의 짧은 막을 내린다.

응팔 vs. 청춘시대,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윤진명의 대사. 그의 한마디가 가슴에 박힌다.

윤진명의 대사. 그의 한마디가 가슴에 박힌다. ⓒ JTBC


이제 겨우 2회 남겨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응답하라 1988>(아래 응팔)을 떠올렸다. '응답하라 2016'을 만든다면 이런 모습일 거다. 다만,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고 현실은 좀 더 고달플 뿐이다.

아르바이트를 아무리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윤진명(한예리 분)과 소녀같은 엄마와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와의 사연을 안은 새내기 유은재(박혜수 분), 연인이 생기지 않는 게 고민인 송지원(박은빈 분), 상처입는 연애에 끌려다녔던 정예은(한승연 분), 기정호 사고에서 살아남은 뒤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강이나(류화영 분).

<응팔>에서 '특공대'(특별히 공부 못하는 대가리)라 불렸던 덕선이는 커서 승무원이 됐지만, 알바 시간에 쫓겨 밥을 먹으면서도 공부하는 <청춘시대> 윤진명의 취직은 요원해보인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진명에게는 가슴 설레는 사랑도 '죽을 날짜를 정해놓은 뒤'에야 가능하다.

1960~1970년대생들이 주인공이던 <응팔>이 부모세대 이야기라면, <청춘시대>는 그 자식들의 이야기다. '부모보다 못사는 첫 세대'라는 수식어를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청춘들의 삶은 퍽퍽하다. 힘든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 때문에 더 절망스럽다.

드라마는 이런 청춘들의 무거운 어깨를 그대로 비춘다. 스폰 애인, 세월호, 무너진 복지제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피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았고, 다섯 배우는 이 시대의 청춘을 그대로 보여줬다.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일까?

 <청춘시대>가 그리는 청춘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청춘시대>가 그리는 청춘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 JTBC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다섯 청춘들이 사는 셰어하우스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보기에 '좋았던 시절'은 오히려 <응팔>의 그때인지도 모른다. 한 번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었고,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시절…. 젊음과 열정만으로 웃으며 살기엔 2016년도의 한국은 '조금' 버거우니까.

꼭 한번 <청춘시대>를 정주행해보길 권한다. 음반계에서 종종 나오는 '차트 역주행'을 드라마에서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이 작품을 밀고 싶다. 진명, 은재, 지원, 예은, 이나... 그중 적어도 하나는 내 얘기일 것이고, 다섯 명 모두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다섯 감정들처럼.)

2012년에 개봉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남자주인공 길은 1920년대를 동경한다. 그 시절이 더 낭만적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타임머신 마차'를 타고 만난 1920년대 이들은 벨 에포크 시대를 동경하고 있었고, 벨 에포크 시대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가 '좋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어른들이 '좋을 때다'라고 하는 20대가 지금도 같은 의미에서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작은 희망까지 놓을 순 없는 건, 부딪히고 깨지면서 사람때문에, 친구때문에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다. 드라마 속 다섯 청춘들처럼.

27일 <청춘시대>가 어떤 희망을 보여주며 막을 내릴지 기대하는 이유다.






 윤진명의 대사에 마음이 아리다. 이제 단 두 회밖에 남지 않은 이 드라마. 어떤 희망을 남기고 종영하게 될까.

윤진명의 대사에 마음이 아리다. 이제 단 두 회밖에 남지 않은 이 드라마. 어떤 희망을 남기고 종영하게 될까.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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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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