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저는 대학 전공에 완전히 흥미를 잃으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전망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공 말고 뭔가 다른 걸 해야 내 인생이 의미가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면밀하게 검토하여 가능성을 점검해 봤죠. 그런 과정을 거쳐 선택한 것이 바로 영화였습니다.

한 살 위의 사촌형과 함께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 시내 중심가의 유명 극장들을 누비고 다녔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었기 때문에 전혀 뜬금없는 선택이 아니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그냥 좋아하던 애가 영화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 진짜 꿈같은 소리처럼 들렸나 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결정을 알리자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저를 뜯어말리려고만 했지요.

그러던 차에 만난 것이 영화 <남자는 괴로워>입니다. 이명세 감독의 95년작인 이 작품은 개봉했을 당시 거의 1주만에 극장에서 내려갔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 실패를 겪었죠. 전작 <첫사랑>(1993)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망했던 차라 이명세 감독이 과연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이 작품을 VHS 테이프로 봤습니다. 감독의 다음 작품인 <지독한 사랑>(1996)이 개봉할 때 모 잡지에서 이명세의 영화 세계를 조명한 특집 기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감독 데뷔작인 <개그맨>(1988)은 고등학교 때 TV로 해준 걸 봤고, 히트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도 본 상태였기 때문에 <남자는 괴로워>를 VHS로 빌려다 봤습니다. (개봉한 지 좀 된 <첫사랑>은 당시 대여점에서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주받은 걸작 <남자는 괴로워>

 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포스터. 만년 과장인 안 과장(안성기)을 중심으로 샐러리맨의 애환을 다룬 슬랩스틱 코미디 뮤지컬이다

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포스터. 만년 과장인 안 과장(안성기)을 중심으로 샐러리맨의 애환을 다룬 슬랩스틱 코미디 뮤지컬이다 ⓒ (주)익영영화


<남자는 괴로워>는 오성전자라는 대기업의 신제품 개발실에 다니는 샐러리맨들의 애환을 다룬 슬랩스틱 뮤지컬 코미디입니다. 당시 영화 홍보는, 마마보이 신입사원 역할의 박상민(<장군의 아들> 주연)과 회사 선배로 나온 김혜수의 멜로 라인을 암시하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사실 이 영화는 만년 과장으로 나온 안성기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초반부터 완전히 집중해서 봤습니다. 당시의 한국 영화에선 보기 드문 그래픽 방식으로 처리한 자막도 특이했고, 출근길 지하철의 엄청난 인파를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으로 표현하는 도입부 시퀀스는 단숨에 저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죠. 그 뒤로도 정말 웃기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아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저 영화를 몇백 편 본 수준이던 그때는 물론이고 수천 편의 영화를 본 지금까지도 그렇게 저를 사로잡았던 영화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만년 과장 안성기의 마음속 풍경들을 다룬 두 개의 뮤지컬 시퀀스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하나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안 과장의 몽유병 속 세상을 도리스 데이가 부른 노래 <캐 세라 세라>에 맞춰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유명한 빗속 노래 장면을 대중가요 '아빠의 청춘'에 맞춰 훌륭하게 패러디한 것이죠.

이 '저주받은 걸작'을 저는 왜 그리 좋아했던 걸까요? 일단 무지 웃겼기 때문입니다. 샐러리맨의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과장돼 있는데도 말이죠. 마치 옛날 무성 영화 시절의 채플린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고민에서 벗어나 맘 놓고 웃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때 깨달았죠.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한국 영화도 하나의 자기 완결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6년은 90년대 후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지금의 한국 영화계를 이끄는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발굴되었고, 다양한 장르의 완성도 높은 영화들이 공개되었으며, 영화 산업화의 기틀이 잡히던 그 빛나는 시기가 곧 다가오기 직전이었죠.

96년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이 다루는 이야기 속 세계라는 것은 뭔가 작위적이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많았고, 좋은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 부족한 완성도를 가려 줄 때도 많았지요. 당시 가장 각광받던 박광수 감독이나 장선우 감독의 영화들도 그랬습니다.

무엇이든 이뤄질 거야 캐세라세라

 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한 장면. 안 과장(안성기)는 윤 부장(윤주상)에게 회식 자리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술값 계산까지 강요당한다. 윤주상의 헤어 스타일이나 안성기의 표정이 보여 주듯 과장된 톤의 코미디 연기가 주를 이루는 영화이다.

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한 장면. 안 과장(안성기)는 윤 부장(윤주상)에게 회식 자리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술값 계산까지 강요당한다. 윤주상의 헤어 스타일이나 안성기의 표정이 보여 주듯 과장된 톤의 코미디 연기가 주를 이루는 영화이다. ⓒ (주)익영영화


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죠. 영화 속에 구축된 세상이, 현실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평행우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할리우드의 뛰어난 영화들이 그래왔던 것처럼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모두 꿈이고 환상이며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걸 스크린을 통해 만날 때만큼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더 좋았던 것은, 그런 몰입 상태가 할리우드처럼 매끈한 이음매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욕망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따라간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상업 영화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많이 보지 못했기 떼문에, <남자는 괴로워>가 보여준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은 더더욱 빛나 보였습니다.

당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보여 준 부정적인 반응들은 저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습니다. 겉으로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수 있는 척했지만,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잘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었죠. 그런 심리 상태의 저에게 이 영화는 '이렇게 개성적인 방식으로도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라고 말하며 따뜻한 격려를 건네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결정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하기로요. 그 뒤 20년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대학 영화과에서 다시 들어가 공부를 마친 다음, 현장 연출팀으로 경력을 쌓았고, 그 후 현재까지 감독 데뷔작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있지요. 아무것도 몰랐을 때 세웠던 계획보다 5년 정도 늦춰졌지만, 여전히 영화 보기를 좋아하고 그 감상을 여러 사람과 나누는 걸 즐기며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늘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질 나쁜 사람들과 엮이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도 많았죠. 특히 아이가 둘이나 생기면서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걱정이 많을 때마다 이 영화 속에서 안성기 과장의 불안한 심리를 다독여 주는 도리스 데이의 목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냐. 캐 세라 세라. 무엇이든 될 터이니 염려 놓으렴. (The fur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이란 노랫말을요.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OOO' 응모 기사입니다.
남자는 괴로워 영화 이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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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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