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피해자의 서사'는 대충 이런 식일 것이다. 마침내 누군가 폭력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경험에 동정심을 느끼고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피해자의 곁에서 그 사람을 보듬고 보살핀다.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처벌받고, 어디론가 격리된다. 이제 피해자의 삶에는 행복만이 남았다. 그 사람은 이제 폭력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인생을 휘청거리게 만든 한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사건 이후 내가 겪은 상황은 이렇다. 사람들의 동정심은 늘 호기심과 함께 오기 마련이다. 나는 어느 순간, 죽을 만큼 싫은 그 경험이 내 이름이 되어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 나를 아끼는 가까운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낼 때면, 내가 또 어디가 안 좋아진 건지,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그대로 나에게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내가 겪은 폭력이 가능했던 공간을 벗어난 순간의 감정을 기억한다. 뛸 듯이 기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두려움과 불쾌감이 나를 잠식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일을 겪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영화 <여자, 정혜>는 피해자의 서사를 섬세하게 담고 있다.

영화 <여자, 정혜>는 피해자의 서사를 섬세하게 담고 있다. ⓒ 쇼박스


고립된 폭력의 경험

어쩌면 그것은 기시감이었을지도 모른다. 폭력이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되었을 때, 그것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이제는 내가 볼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내 경험의 무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혼자 짊어지고 가기에는 벅찼지만, 선뜻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만큼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힌 내 지인들은, 내가 앞서 이야기한 과정을 몇 배는 증폭된 버전으로 경험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일부분을 고립시키는 결정을 한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일상을 살아가지만, 삶의 강렬했던 일부분은 집안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다.

영화 <여자, 정혜>의 주인공인 정혜의 일상도 이와 유사하다. 영화의 초반, 카메라는 정혜의 단조로운 일상을 느긋하게 비춘다. 정혜는 집을 가꾸고, 일하고,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보낸다. 보다 보면 이게 영화로 만들 만한 이야기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야기가 점차 진행되며, 나는 익숙하지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정혜는 24시간 TV를 틀어놓고 길고양이를 거두어들일 정도로 외로움을 느끼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오면 문을 3중으로 잠그고 누구도 들이지 않는다. 동료와의 친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수준에서만 멈춘다. 정혜가 전 남편과 점심을 먹고 온 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하던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하긴, 네가 그런 거 있다고 말할 애는 아니니까."

말하자면 정혜는 고립되어있다. 이 같은 고립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도, 누군가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요된 것도 아니다. 단지 정혜의 경험이 그녀를 이런 삶으로 이끈 것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알려지는 사실이지만, 정혜는 어린 시절 고모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에게 정혜의 행동은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지만, 정작 그녀의 주변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가령 전남편과의 신혼여행에서 억지로 성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첫 성 경험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받은 후, 정혜는 곧바로 그를 떠난다. 후에 정혜의 사연을 알게 된 관객들은 전남편의 행동이 정혜로 하여금 성폭력 피해를 상기시키게 했고, 그래서 그녀가 그를 떠났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정혜의 주변인들은 그녀의 정신이 이상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거나 정혜에게 "도대체 왜 그랬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일상의 틈바구니로 비집어 넣기엔, 그녀의 경험이 가진 무게는 정혜 스스로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그동안 카메라는 끊임없이 홀로 먹고, 씻고, TV를 보는 그녀를 비춘다. 그리고 그만큼 정혜가 겪는 고립과 외로움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전달되지 못하는 분노

 피해의 경험만을 안고서 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피해의 경험만을 안고서 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 쇼박스


이렇게 유폐되는 것은 폭력의 경험 자체뿐만이 아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유발된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 경험이 안겨준 우울, 절망, 원통함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있다. 이 분노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것을 안고 가는 사람을 탈진시킨다. 그리고 이 분노는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무감각해지고 안정을 가장한다. 영화 속 정혜의 평온한 표정에서 한편으론 공허함이 느껴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감정은 마치 땅속을 흐르는 용암처럼 누군가의 몸속을 흐르다 이따금 분출된다. 많은 수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영화 속 정혜 역시도 그렇다. 우연히 칼을 구한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한 고모부를 찾아간다. 하지만 피해자의 복수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경험을, 그 순간의 무력감과 공포를, 그 사람을 압도한 가해자의 막강한 힘과 권력을. 폭력의 중단이 가해자와의 관계가 종식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혜의 옆에 앉은 고모부는 아무 말이 없다. 마치 사과하거나 애걸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을 아는 것처럼.

이처럼 피해자의 날을 세운 칼이 가해자를 찌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칼날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이런 맥락에서, 복수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정혜가 실수로 자신의 칼날에 상처를 입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한국사회는 유독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다. 정혜의 경우처럼, 피해자의 칼은 가해자가 이미 형성해놓은 권력을 뚫지 못한다. 그 칼날은 고스란히 다시 돌아온다. 약자는 늘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폭력을 겪던 곳을 떠나기 전, 나는 나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내가 끔찍한 선택을 하게 만들고, 그런 나를 다시 경멸했던 사람의 이름과 사는 곳을 메모했다. 언젠가는 되돌려 주리라 이를 갈며, 나는 책 페이지 사이에 그 메모를 숨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책을 정리하다 우연히 그 메모를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 두렵다는 것을. 우연히 그를 마주친다고 해도 뒤돌아 도망갈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저앉아 하염없이 우는 것뿐이었다.

<여자, 정혜>가 전하는 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해자의 서사를 극단적으로 상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해자의 서사를 극단적으로 상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 쇼박스


때문에 폭력의 경험에는 마침표가 찍힐 수 없다. 누군가는 오직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말하지만, 피해자의 일상으로는 항상 과거의 시간들이 역류해 들어온다. 그래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그 경험과 감정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체득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피해자들의 서사를 극단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극복하거나 추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양극단 사이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산다. 완전한 극복이 불가능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정혜가 칼을 구하고 복수를 마음먹은 후, 그녀가 시장을 둘러보며 물건을 구경하고 순대를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처음 이 영화를 본 나는, 그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자기 고모부를 죽이기로 결심했는데, 도대체 순대가 입으로 들어갈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메모를 발견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고, 그런 다음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엉금엉금 주방으로 기어가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삶은 영화가 아니다. 그렇게 운 다음에 모든 컷이 편집되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내 삶은 구성되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뭔가를 하려면 먹어야 한다.

기억이 떠오르고, 감정에 젖어들고, 그리고 돌출시켰다 다시 잠잠해지는 일. 이런 일들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이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순간들에 점차 몸이 적응한다. 다시 어떤 일을 하는데 일주일이 걸리던 것이 어느 순간 하루가 되고, 어느 순간 한 시간이 된다. 때문에 단조로운 일상과 극단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정혜의 삶은 매우 사실적이다. 과거의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삶이 폭력으로 관통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폭력을 겪은 사람의 지극히 일반적인 삶임을. 그녀는 나였고, 나는 그녀였다.

영화의 내내 정혜는 외부 세계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그는 길고양이를 집으로 들이고, 우체국에 자주 들르는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접촉의 과정이 항상 물 흐르듯 용이하지는 않다. 중간에 그녀는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잠이 들었던 남자는 약속 시각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우체국에 출근하지 않은 그녀를 찾아 그 남자는 정혜의 집을 다시 찾는다. 그와 마주친 정혜의 표정은 묘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희망이 교차한다. 그 속에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다. 삶은 나빠지거나 조금씩 나아짐을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흘러갈 뿐이다.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정혜들에게 무던하지만, 현실적인 위로와 애정을 전한다. 그 힘을 빌려 나도 여기까지 왔다.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여자, 정혜>
여자, 정혜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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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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