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나의 20대가 떠오른 드라마가 있다. 2010년 가을로 접어들 무렵 KBS2에서 방송된 <성균관 스캔들>.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가계를 책임지던 김윤희(박민영 분)가 남장을 한 채 성균관에 들어간 후 벗을 사귀고 세상에 눈 뜨고 꿈을 품어가는 과정을 푹 빠져서 지켜봤다.

"살아야했습니다. 전 그저… 살고자 했을 뿐입니다. 살아 처음이었습니다. 학문이란 무엇인지 난생 처음 질문도 갖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제 재주를 알아봐주는 이도 만났고, 난생 처음 제 편이 되어주는 이도 만났습니다.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이 세상에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꿈꿀 기회를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 <성균관 스캔들> 중

재수로 들어갔다는 것 빼고는 김윤희와 같은 드라마틱한 사연은 없지만 대학은 내게도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아침부터 밤까지 교과서를 파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언제였는지도 잊을 만큼 입학하자마자 대학생활에 젖어들었다. 어리바리한 신입생들에게 "대학에도 애국조회가 있고,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다녀야 한다"고 농담하던 재미있는 선배들도 좋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들과 생활하는 것도 즐거웠다.

 벗과 함께 학문의 길과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던 <성균관 스캔들> 속 '잘금 4인방'은 오늘날 청춘과 다르지 않았다.

벗과 함께 학문의 길과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던 <성균관 스캔들> 속 '잘금 4인방'은 오늘날 청춘과 다르지 않았다. ⓒ KBS


무엇보다 그땐 '자유'가 있었다. 강의 시간에 '땡땡이 칠 자유', 한낮에 잔디밭에 앉아서 '술을 마실 자유', 집에는 엠티 간다고 거짓말 하고 '과방에서 밤을 샐 자유'…. 꽉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와 함께 '책임감'도 느꼈다. 공부 안 하면 구멍 난 성적표를 재수강으로 메워야 한다는 책임, 청춘으로서 사회 문제에 눈 감아서는 안 된다는 책임, 친구가 힘들 땐 함께 곁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학부제 첫 세대로 1학년 말 전공 선택 때, 지원자가 많은 과를 성적순으로 뽑는 걸 막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결국 동기 몇 명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과에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계는 많았지만 세상의 모순에 맞서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20대를 떠올려준 <성균관 스캔들>

그랬기에 당파 싸움에만 매달리는 기성세대를 매섭게 비판하고, 새로운 조선을 꿈꾼 '잘금 4인방'(<성균관 스캔들>의 네 주인공 윤식, 석준, 용하, 재신을 한데 묶어 부른 별칭)에 매료됐는지도 모른다. 

"지혜는 감추고 신념을 버려야 하는 것이 출사라 하면 그것이 그저 벼슬을 사냥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 인간이 알려줬지. 성균관의 문은 임금이 있는 궁이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천하다 멸시받는 빈촌을 향해 나있다는 걸."

"굴레를 씌운 건 고약한 세상이지만 그걸 벗는 건 김윤식, 네 몫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과녁 앞에 서기 마련이다. 활을 다 쏠 때까진 누구도 그 앞을 벗어날 수 없어."

 “그 인간이 알려줬지. 성균관의 문은 임금이 있는 궁이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천하다 멸시받는 빈촌을 향해 나있다는 걸.” 걸오(유아인 분)가 한 대사들은 오늘날 정치인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 인간이 알려줬지. 성균관의 문은 임금이 있는 궁이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천하다 멸시받는 빈촌을 향해 나있다는 걸.” 걸오(유아인 분)가 한 대사들은 오늘날 정치인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 KBS


"버텨내질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뒤처져있는 한심하고 무능하고 초라한 제 자신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말이오. 사람에게 그보다 더 큰 재능이 필요합니까?"

"난 지금 이 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오. 이 다음에 우리가 성균관을 나가서 더는 함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억해야지. 지금 우리가 했던 고민들, 지금 우리가 느낀 두려움, 기뻤던 순간들, 그리고 언제나 함께였던… 동방생들 모두. 그럼, 어쩌면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극 중 대사들을 수첩 한 구석에 적으면서 '더 좋은 사람'이 못된 채, 20대에 비판하던 기성세대 그대로를 닮아가던 스스로를 돌아봤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에 시큰둥하던 내 가슴에 불이 붙었다. 그때, 처음으로 '팬질'이란 걸 해봤다. 나에게 20대에 품었던 열기를 불어넣은 작가가 누군지 파기 시작했다. 역시 명대사로 유명한 <대왕세종>을 공동집필했다는 것밖에 별다른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인터뷰가 나온 매체도 한 곳 정도였다.

생애 첫 '팬질'의 결과

 <드라마시티-이중장부 살인사건>에는 김태희 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생활의 경험이 녹아있다.

<드라마시티-이중장부 살인사건>에는 김태희 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생활의 경험이 녹아있다. ⓒ KBS


더 그가 궁금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열심히 레이더망을 가동하니 그와 연이 닿았다. 그렇게 해서 '연예'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매체에 바로 그, 김태희 작가와의 인터뷰를 실을 수 있었다. 2011년 1월, 웃는 모습이 시원스러운 그와 마주앉아 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6~7살에 봤던 드라마까지 기억해내는 김 작가의 비상한 기억력에 놀라고, 결혼 후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가 아니라 내 이름을 찾고 싶어서" 작가교육원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에 같은 엄마로서 극히 공감하기도 했다.

데뷔작인 KBS2 <드라마시티-이중장부 살인사건>이 나온 배경도 들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한 은행 사내방송국에서 구조조정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 때였다고 한다.

"그때 은행에서 희망퇴직자 1200명이 나간다는 보도를 했어요. 그 보도 후 다른 프로그램 취재를 갔다가 희망퇴직자 명단에 실린 한 분을 만났어요. 자식이 둘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게 잊히지 않더라고요. 1200이란 숫자지만 그 뒤엔 1200명의 인생이 있는 거 아닌가. 그때 숫자와 개인의 삶에 대해 고민을 했고, 이후에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죠."

그때의 경험은 숫자가 신념인 100% 회계사 강용주(안석환 분)가 후배 회계사에게 하는 대사에 고스란히 실린다.

"누군가는 수건을 만들고, 누군가는 수건을 빨고, 또 누군가는 그 수건을 부지런히 쓰면서 사는 거야. 수건 120개란 숫자는 그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흔적이지. 나한테 숫자는 그냥 숫자가 아니라 땀 냄새 나는 안간힘이야. 진정한 땀방울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지."

그는 작가가 되기 전, 방송국 PD들로부터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작가로서 지녀야 할 재능은 부족하지만 작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차고 넘쳤기 때문에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그를 설레고 열광케 했던 수많은 드라마들처럼 "일상의 호사스러운 문화생활이라곤 고작 드라마가 다인 내 이웃들에게 삶의 위로를 전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도 했다.

아이돌의 컴백을 기다리는 10대 팬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김태희 작가는 <뷰티풀 마인드>를 통해 인간의 공감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다시 돌아온 김태희 작가는 <뷰티풀 마인드>를 통해 인간의 공감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 KBS


그런 그였기에 다음 드라마를 기다렸다. 때때로 생각날 때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김태희 드라마작가'를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소식은 정말 찾기 힘들었다. 가뭄에 콩 나듯 들려오는 소식을 가슴 설레며 기다릴 뿐이었다. 아이돌의 컴백을 기다리는 10대 팬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드디어 올봄, 그의 프로필에 새 드라마가 추가됐다. 당초 알려졌던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아닌 <뷰티풀 마인드>라는 좀 밋밋한 제목이었지만 제목은 중요치 않았다. 팬에겐 그가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니까.

생애 첫 팬질이긴 하지만 난 열성팬은 아니었나 보다. 나이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밤늦게 시작하는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기 힘들었다. 대신 처음으로 IPTV 월정액 서비스를 결제한 뒤 지난 방송들을 뒤늦게 보면서 '이렇게 좋은 드라마의 시청률이 왜 그렇게 낮은 걸까' 안타까워했다.

공감능력 제로인 천재 외과의사 이영오(장혁 분)가 환자들의 기묘한 죽음에 얽히면서 사랑에 눈 뜨고 인간성을 찾아간다는 <뷰티풀 마인드>는 이 짧은 설명으로는 부족한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환자의 생명보다 돈을 더 따지는 의료계 현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인간의 이중성,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는 부모의 폭력들…. 한 회 한 회를 거듭할수록 인간의 마음이 과연 아름답기만 한지를 묻는 드라마였다.

그 질문을 주연만이 아닌 조연과 단역들의 삶을 통해 던지고 있는 것도 좋았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청각 장애인 아들 동준(방대한 분)이 누구보다 소통 잘하는 부자였음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쪽지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에어컨 실외기를 달다가 추락 사고를 당해 다시 병원에 실려 왔다가 숨진, 전문의 양성은(동하 분)의 친구 한모의 낡은 작업화와 가방 속에 남겨진 컵라면, 감정이 없는 이영오를 처음 눈물 흘리게 한 환자 조윤호(이재우 분)가 죽기 전에 남긴 동영상…. <뷰티풀 마인드> 곳곳엔 한참씩 눈길을 멈추게 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뷰티풀 마인드>로 돌아온 작가 김태희

 <뷰티풀 마인드>는 조연과 단역들도 캐릭터가 살아서 보는 맛을 더했다.

<뷰티풀 마인드>는 조연과 단역들도 캐릭터가 살아서 보는 맛을 더했다. ⓒ KBS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인지 엄마의 역할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가 부각된 장면은 특히 눈이 갔다.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임산부라는 이유로 병원 구조조정 대상이 됐던 간호사 장문경(하재숙 분)이 대리모 계약 때문에 수술을 주저하는 여성에게 "돈 몇 푼에 흥정하려는 인간들에게 우리 지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모든 부모는 아이가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첫사랑", "자식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부모들의 불행한 착각" 같은 대사가 가슴에 꽂혔다.

5년 전 인터뷰에서 "신화의 세계에서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하면서 어른이 돼 간다"고 했던 김 작가는 <뷰티풀 마인드>의 끝을 이영오와 아버지 이건명(허준호 분)의 화해로 장식했다. 그 속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담겨있을까. 또, 시청률 저조로 사라진 2회분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을까. 깜깜했던 창밖이 환해질 때까지 끊지 못하고 드라마를 계속 본 후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 계속 떠올랐다. 다시 또 전화번호부를 뒤져 그와의 만남을 시도해야 할까. 아니, 오랜 집필로 몸과 마음이 지쳤을 작가를 쉬게 하고 다음 작품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도 팬이 할 일일 거다.

김 작가는 곧 '인간'을 파고드는 좋은 작품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30대 마지막 해에 만났던 그는 40대를 앞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지는 일을, 제 자신을 다그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 나이에 뭘, 이대로 살다가 죽지. 이렇게 나이에 지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태희 작가가 스스로를 다그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검색창에 종종 그의 이름을 치는 나의 팬질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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