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영화 <민우씨 오는 날>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이 만든 단편이다. 이 영화 역시 강 감독의 북한에 대한 시선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영화 <민우씨 오는 날>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이 만든 단편이다. 이 영화 역시 강 감독의 북한에 대한 시선이 잘 반영되어 있다. ⓒ 빅픽쳐


"Not just anybodies." (그저 아무나가 아니다)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차분했다. 낮은 톤의 음성은 묵직하게 그 공간을 채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손을 점차 꽉 움켜쥐었고 굳게 지키던 무표정이 무너졌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준 UN주재 한국대사였다. 2014년 12월 22일 열린 UN 안정보장이사회에서 오 대사는 북한인권상황을 이야기하며 북한의 주민들을 'not just anybodies'라고 표현했다.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무엇인가 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다.

같은 달 18일, 30분이 채 안 되는 단편 영화 하나가 극장에 걸렸다. <민우씨 오는 날>이었다. 민우씨는 북으로 갔다. '북'이라는 말은 무거웠다. 동서남북, 방향을 뜻하는 이 말은 언어, 인종, 문화를 불문하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이다. 하지만 유독 한반도에서 북은 다른 의미를 더해갔다. 때로는 둘이었고, 하나이기도 했다. 가족인 동시에 원수였다. 양립할 수 없는 수많은 의미를 내포해가며 북을 이야기하는 것은 점차 더 무겁고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70년이 지났다.

과거와 현실에도 변하지 않는 남과 북의 벽

<민우씨 오는 날>은 겹겹이 쌓여온 70년이라는 시간에 관한 영화이다. 연희(문채원 분)는 금방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 남편, 민우(고수 분)씨를 기다린다. 담담히 반복되는 하루를 보낸다. 집 앞을 쓸고 빨래를 넌다. 함께 가기로 한 평양냉면집에서 식사를 한다. 민우씨를 위해 차릴 숭어국 생각으로 장을 본다. 그런 하루, 연희의 평범한 일상을 뒤 쫓는다.

영화 속 연희는 20대의 외모이다. 민우씨가 떠나던 날의 모습으로 기다린다. 연희의 기다림뿐 아니라 7만 명밖에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의 기다림은 아직 그 날에 놓여있다. 그 날 이후, 모두는 미처 늙지 못했다. 영화는 그 기다림이 촘촘하게 스며든 하루를 그렸다. 그리고 다시 그 하루를 28분이라는 시간을 통해 담아냈다. 묵직하고 또 묵직하게.

<민우씨 오는 날>은 굵직굵직한 영화를 연출해온 강제규 감독의 영화다. 강 감독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지속적으로 남북문제를 영화의 주제로 다뤄왔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민우씨 오는 날>은 남북문제, 분단 현실의 한 면을 그린다. 성격은 조금 차이가 있다. 두 전작의 경우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의 개인이기 이전에 국가와 체제이다. <쉬리>의 한석규는 '남'을 최민식은 '북'을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과 장동건은 각각 '남'과 '북'을 나타낸다. 두 영화는 분단현실과 역사를 잔뜩 노려봤다. 북의 특수부대와 남의 첩보기관의 이야기, <쉬리>와 형제가 한국전쟁이란 역사의 한복판에서 깊어져만 가는 갈등을 골을 이야기하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역사와 이념 앞으로 몰아세웠다.

반면 <민우씨 오는 날>에서 강 감독은 눈에 힘을 뺀 채 담담하게 바라본다. 남과 북이라는 큰 벽은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허물어졌다. 잔잔하지만 오래도록 울렸고 울렸다. 오준 대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랬고, 연희의 모습이 그랬듯이.

무관심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영화 <민우씨 오는 날>의 한 장면.

영화 <민우씨 오는 날> 속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은 그저 이들만의 아픔이 아니다. 우리 전체가 여전히 안고 있는 상흔이다. ⓒ 빅픽쳐


영화는 70년이라는 마음의 거리를 연속한 쇼트들로 넘나든다. 기다림이라는 말 속에 깊게 베인 시간과 감정이 응축되어 편집점을 관통한다. 그 순간의 한 마디에 형언 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밀려들어왔다. 오대사의 연설을 들을 때와 유사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파도가 빠지고 나자 비로소 안타까운 모습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외면해서는 안 될 현실이 놓여있다.

<민우씨 오는 날>은 '뷰티풀2014'라는 홍콩국제영화제의 옴니버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비 전액을 지원받았다. 아시아 4명의 감독 중 하나로 강제규 감독이 선정됐다. 애석하게도 빛보다 그림자가 더 크다.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일에 타국의 자본이 자리 잡아서다.

UN에서 북한 인권을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북한인권현장사무소가 서울에 설립됐다. UN 주체 하에 진행되는 일이다. 달갑지만은 않다. 또다시 우리의 일을 외세에 의존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문제에 대한 우리의 움직임은 늘 이렇게 한 발짝씩 느렸다. 주체적이지 못하다.

북한 인권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 문제는 그게 무엇이든 늘 정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정치적 입장을 위한 싸움의 도구로 전락했다. 그 때문에 2008년 8월 발의된 북한 인권 관련 법률은 10년이 다되도록 표류하가 올 3월에야 공포됐다.

북한인권현장사무소의 한국 내 설립 결정은 그 10년 간, 우리가 무관심 하는 중 일어났다. 민우씨가 평양으로 떠나던 그 날도 그랬다. 해외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은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연희의 딸 사라의 전화가 왜 미국으로부터 걸려온 것인지, 스스로를 왜 괴물이라고 표현하는지 되새기게 된다. 어딘가 먹먹하게 만드는 가장 큰 지점이다. 연희는 민우씨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민우씨가 오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너무나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민우씨 오는 날>
민우씨 오는 날 북한인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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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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