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배우가 되고 싶은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외계인처럼 앞뒤가 긴 두상에 여드름투성이의 피부, 살짝 칼로 그어놓은 느낌의 두 눈을 가지고 배우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걸 충분히 인지할 만한 나이였다. 배우에 대한 갈망이 역치에 다다를 때면 영화관을 찾았다. '할리우드 키드'만큼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도서관보다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소년이 자라 진로를 선택할 무렵, 잠시 고민은 했지만 결국 '장래가 보장된다'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배우의 꿈을 차마 접을 수 없었던 청년은 학과 공부보다 연극반 생활에 몰두했다. 애당초 주연과는 거리가 먼 얼굴형이기에 코믹 연기로 살아남자 결심했던 청년에게 때마침 눈에 띄는 영화배우가 있었다. 이후 청년의 연기 스승이자 롤모델이 된 그 영화배우의 이름은 바로 박중훈이다.

조각상 같은 외모를 지닌 건 아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풍성한 콧방울, 그리고 살짝 뒤집힌 두툼한 입술은 배우로서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연대기에 대해 여기서 논할 생각은 없다. 언제 데뷔를 했고, 왜 유학을 갔으며, 어떠한 작품을 했는지 줄줄 꿸 정도로 박중훈이라는 배우의 광적인 팬은 아니었으므로. 다만, 내 청춘의 가장 푸르렀던 이십 대의 강을 함께 건너 준 배우로서, 내 기억 속의 그를 떠올려보고자 한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톱스타>의 박중훈 감독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박중훈은 그 소년의 연기 스승이었다. ⓒ 이희훈


완벽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박중훈

사실 여고생들을 설레게 했던 <청춘스케치>나 대학에 가서 접한 <우묵배미의 사랑>, <칠수와 만수> 같은 사회성 짙은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 배역은, <투캅스>에서의 타락해 가는 형사 역이었고, 심장의 울림을 느낀 건 <게임의 법칙>의 깡패 역할이었다. 이 후 <마누라 죽이기>를 시작으로 코믹 연기의 지존이라 일컬어지며 스크린과 광고를 누비던 그의 모습은 코흘리개 연극반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발로 하는 연기'가 고작이었던 연극반 신입생 시절, 해병대 캠프보다 혹독했던 연극 연습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건 연기보다는 '흉내'였다. 몽둥이를 끼고 앉아 연구해 온 캐릭터를 검사하는 선배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기꺼이 박중훈이 되고자 했다. 코믹 연기라는 건 결국 타이밍의 문제였고, 그 시절 박중훈만큼 독보적인 존재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 속 박중훈의 인물을 따라하는 게 일상처럼 되었다. 뒤로 훌렁 넘긴 머리를 만들기 위해 아침마다 30분씩 무스와 헤어스프레이로 공을 들였고, 어쩌다 선배들이 맥주라도 사주는 날이면 '라라라' 춤으로 보답했다. 한쪽 눈썹을 치켜뜨는 표정 연기를 따라 하다가 안면마비가 올 뻔했고, 뒤집힌 입술이 부러워 사회에 불만 있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내밀고 다닌 적도 있다.

'박중훈 따라하기' 덕분이었는지, 연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인지 지금도 명확히 정의하긴 어렵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연극반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자리매김을 하게 됐다. 방학만 되면 친구들은 배낭 메고 해외로 떠날 때, 나는 곰팡이 핀 지하 동아리 방에서 제2의 박중훈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어쩌면 같은 연극반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도 그때 나의 '박중훈스러운' 연기에 반했는지 모른다.

1997년 한해에만 다섯 편의 영화에 얼굴을 보인 그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이 식어갈 무렵, 나 역시 그간 소홀했던 학업에 전념하며 연극반 생활에서 잠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건가?'라고 그를 떠올릴 때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강력하게 돌아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강력반 영구'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이 영화로 그는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고, 해외 진출의 계기를 만든다.

그가 해외에서 열심히 영화를 찍고 있는 동안, 나도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진로로 연극배우를 잠시 생각하기도 했었으나, 빚으로 고스란히 남겨진 대학 등록금과 평생 식당일로 무릎 관절이 녹아버린 어머니를 생각해 전공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물론 배우를 하기에는 따라주지 않는 신체조건과 자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음을 인정한다. 그때부터 배우로서 꿈꿀 수 있는 상상의 날개를 모두 잘라버리고, 현실이라는 삭막한 대지에 발을 디디게 된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톱스타>의 박중훈 감독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라디오스타> 속 박중훈에게서 나는 그 시절처럼 다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 이희훈


그가 오랫동안 배우로 곁에 남아있길

그 후로 몇몇 그의 영화들이 나왔지만, 예전처럼 챙겨보거나 영화 속 그의 연기를 따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도 바쁘고 나 역시 먹고살기 바빴기에 어쩌다 시간이 맞는 날 우연히 그의 영화를 보는 정도가 '우리 관계'의 전부였다. 2003년 <황산벌> 이후로 이렇다 할 흥행작을 내놓지 못하던 그를 다시 기쁨 속에서 재회하게 해준 영화는 바로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작인 <라디오스타>다.

국민 배우 안성기라는 명콤비를 만나 왕년의 가수왕 '최곤' 역할로 그의 건재함을 알린 것이다. 당시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든 상황이었던 내게 박중훈의 존재는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낸 벗에게 희망을 가지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그런 일 가지고 힘들어해, 나도 이렇게 살고 있잖아! 자, 기운 내라고!' 영화관 속의 다른 관객들을 제치고 마치 나에게만 말을 거는 듯했던 그의 친숙한 표정과 말투에서 상당한 위로와 용기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최근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0년 작 <내 깡패 같은 애인>이다.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되던 해, 문득 그가 보고 싶어졌다. 아내와 아이가 잠든 틈을 타 심야 극장을 찾았다. 지질한 동네 3류 건달이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찌 보면 그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그 영화에서 내 마음속 박중훈은 다시 살아났다. 비록 흥행 면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난 요즘도 이 영화를 가끔 다시 본다. 때론 진지하고, 때론 코믹하면서도 특유의 건들거림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그를 만나고 싶어서다.

앞으로는 그를 배우보다 영화감독으로 만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기대하는 모습은 배우로서의 박중훈이다. 인생을 같이 늙어 가는 배우가 한 명쯤 있다는 것은 보험 같은 든든함을 준다. 알 파치노나 모건 프리먼처럼 주름진 얼굴만으로도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멋진 배우로 그가 우리 곁에 오래 남기를 바랄 뿐이다.

박중훈 라디오스타 내 깡패 같은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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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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