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기동전사 건담>의 이미지.

▲ 건담의 특별함 <기동전사 건담>은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준 애니메이션이었다. ⓒ Sunrise


"똥과 같이,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배제하는 것."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저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내린 '키치'의 정의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더러운 배설물을 배출하듯이, 만물에는 항상 추한 일면이 존재한다. 1960년대 체코의 화려한 노동절 행진의 이면에는 소련 전체주의 정부의 억압이 있었듯이 말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추함을 외면하고 아름다움만을 내세우는 키치. 작가는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의 행동을 통해 키치에 대한 저항의 방법을 제시한다. 칼로 무대장치를 찢어내 그 뒤의 풍경을 드러내듯이, 아름다운 겉모습을 들어내고 그 이면에 숨은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고.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대장치를 찢어내는 칼, 즉 숨겨진 추함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은 어떻게 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걸까?

거대 로봇을 좋아했던 나, 하지만

오다이바 등신대 건담 일본 오다이바에 있는 등신대 건담상. 다른 작품들을 제치고 건담이 선택되었을 정도로 건담 시리즈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 오다이바 등신대 건담 일본 오다이바에 있는 등신대 건담상. 다른 작품들을 제치고 건담이 선택되었을 정도로 건담 시리즈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 픽사베이


어린 시절의 나는 거대로봇 만화를 좋아했었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크고 강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나 싶다. 크고 멋진 디자인의 로봇에 올라탄 주인공이, 척 보기에도 사악해 보이는 악당 로봇을 물리치는 광경.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거대로봇 만화를 보며 열광하던 어린 나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을 터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처음 역사에 관심을 끌게 되었을 때 내가 파고든 분야는 전쟁사였다. 로봇에 타고 악당 로봇을 물리치는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전투기를 타고 외적을 물리치는 군인으로 치환되었다. 악당들의 본거지가 폭발하는 모습에 열광했듯이, 외적들 대부분이 죽거나 쫓겨났다는 기록에 통쾌해했다. 그렇게 전쟁을 통쾌하고 신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나약한 이들로 치부했다. 그대로 자랐다면 지금쯤 전쟁광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는 반전주의자다. 침략에 맞서는 전쟁을 제외한 모든 전쟁을 악이라고 본다. 과거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셈이다. 계기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전편을 시청했던 일이 그것이다. 이후로 나는 전쟁을 혐오하게 되었고, 이를 부추기는 사람·사상 그 외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거대한 로봇이 등장해 활약한다는 점에서, 건담은 내가 전에 봤던 만화들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걸까. 이유가 있다. 다른 만화들과는 달리, 건담은 '전쟁의 민낯'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전쟁에는 희생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민간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인조차도 대부분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동원되었을 뿐이다. 그런 보통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이 전쟁이다. 내가 봐왔던 만화들에는, 그러한 전쟁의 '추함'이 배제되어있었다. 악당들은 항상 별 이유 없이 세계정복을 외치며 전쟁을 일으키는 절대 악으로, 당연히 없애야 할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죽어가는 모습이 직접 비치진 않았다. 항상 폭발이나 그와 비슷한 거로, 애매하게 사망했음을 암시할 뿐이었다. 내가 접했던 전쟁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만 명이 죽었다는 글귀에는 그들이 죽어가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이 제거되어 있었다. 둘 다 어린 나에게는 '키치'였던 셈이다.

건담은 달랐다, 건담은

토미노 요시유키 건담 시리즈의 창시자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비단 건담만이 아닌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항상 전쟁은 비인간성과 광기의 온상으로 그려진다.

▲ 토미노 요시유키 건담 시리즈의 창시자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비단 건담만이 아닌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항상 전쟁은 비인간성과 광기의 온상으로 그려진다. ⓒ 위키피디아


건담은 달랐다. 작중의 전쟁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자인 지구 정부에게 탄압받다 못해 우주 식민지 정부가 들고일어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제시된다. 지구 정부에 속한 주인공은 우연히 건담에 탑승하여, 적인 식민지 정부의 군대와 싸우게 된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들을 죽이지만, 그로 인해 주인공은 고통받게 된다. 적과 아군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걸 보면서,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점차 성격까지 망가져 간다.

때로는 주인공의 시각이 아닌, 전지적인 시각에서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기도 한다. 곤경에 처한 민간인을 도와준 선한 군인들이 주인공에게 죽는 장면이나, 학도병으로 끌려온 청소년이 로봇 안에서 산채로 타 죽어가는 장면들이 나온다. 거대로봇 만화와 전쟁사라는 '키치'를 찢어낼 반전주의라는 '칼'. 이 칼을 나의 손에 쥐여준 것은, <기동전사 건담>을 본 '경험'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키치를 보게 된다. 추악함을 인정하는 건 어렵다. 누구나 남에게 좋은 점만 보이려 하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길 싫어한다. 처음에는 작은 실수 하나를 숨기다가, 종국에는 큰 악행까지 묻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든 키치가 모여서, 사회 전체의 거대한 키치가 만들어진다. 이 거대한 덩어리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시멘트를 흡수하면서 한도 끝도 없이 단단해져 간다. 그 덩치에 막혀버린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못 보고 지나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를 포함한 세상 전체가 키치가 되어버린다. 이 거대한 키치를 무너뜨리거나, 최소한 꿰뚫어 보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단 한 번의 경험이 그러한 통찰력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살아가면서 겪은 수많은 경험과 그로부터 도출된 깨달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게 통찰력이니까. 하지만 한 번의 인상적인 경험이 그 필요성을 일깨워줄 수는 있다. 나에게는 <기동전사 건담>이 그 역할을 해주었고, 그것이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기동전사 건담>의 이미지.

▲ 키치에 대한 저항 키치로 가득한 이 세상 전체와의 싸움. <기동전사 건담>은 나에게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게 해줬다. 내가 이 만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Sunrise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기동전사 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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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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