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감독판인 '얼티밋 에디션'이 출시되었다. 극장판에서 지적됐던 개연성이 보강됐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대체로 아시다시피, 본 작품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일반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끄트머리에 잠깐 나오는 액션 신만을 기다리는 지루한 영화가 되겠고, 평론가나 슈퍼 히어로 애호가 입장에서는 다소 중구난방에 설득력 없는 인물들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평가에는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내용이나 장면 등등이 조롱거리용 밈(Meme)으로 소비되는 현상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히, 감독 잭 스나이더는 이전 영화들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생각은 상영 종료 후 공개된 감독판을 보고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이 영화를 감독판을 기준으로 재평가하려 한다. 물론 영화는 스크린에 걸린 채로 평가를 받는 게 정석이지만, 감독판은 소설로 치자면 퇴고 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감독의 본래 의도가 더욱 정확히 반영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맥락의 큰 변화 없이 서사가 조금 더 정교해진 경우에는 단지 감독판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 대상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Who Watches the Wachmen?

어떤 예술이든 그것이 몸담고 비슷한 류로 묶여 여러 작품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일련의 흐름, 사조가 있다. 그것은 대중문화도 마찬가지다. 순수예술처럼 학술적으로 엄격하지는 않지만 장르라든가 유행, 스타일은 대중에 의해서든 평론가에 의해서든 그럭저럭 구분되어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나는 DC·마블의 슈퍼 히어로물을 말할 때에는 무술에서 쓰는 '유파'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갈래나 무리'가 사전적 정의이지만, 무술에서는 조금 더 특징을 공유한 집단이라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히어로물의 원류는 당연히 영웅 신화다. 영웅 신화에서 다양한 현대적 영웅 이야기가 발전했고 그 한 지류로 미국의 슈퍼 히어로물이 있다. 에둘러 말하기를 그만두자면, 나는 바로 이 DC·마블만이 가진 슈퍼 히어로물의 특징에 주목하여 이 영화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분히 미국적인 것이고, 동시에 그들의 고유한 것이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 300 >은 분명,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잭 스나이더 감독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고, 찬찬히 뜯어보면 읽을 만한 코드가 많이 있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우리는 잭 스나이더가 이전에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작품은 <300>(2007)이었다. <다크나이트 리턴즈>(세미콜론, 2008)를 썼던 프랭크 밀러의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만화 <300>(세미콜론, 2007)은 히어로물도 아니고 심지어 DC나 마블 출신도 아니다. 하지만 잭 스나이더가 하필 이 작품을 선택한 여러 이유 중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 기억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 유럽중심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동성애혐오적에 마초적이라는 비판까지 숱하게 받았다. 뭔가 기괴하고 야만스럽다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와 달리 잘생긴 식팩펙의 전사들이 자유를 외치며 일당백의 무용을 뽐내는 영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사회가 충분히 깨어있지 않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평가를 중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300>은 무엇보다도 신화적이며 우화적인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 담긴 것은 앞으로 그가 펼칠 슈퍼 히어로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가장 중요한 원리였다. 그것을 감독 자신이 인식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영화에서 드러난 미국적인 히어로관은 향후 작품 속에서 꾸준히 양분을 공급해주고 있다.

 영화 <왓치맨>

영화 <왓치맨>이 던진 "Who Watches the Watchmen?"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후 잭 스나이더의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 CJ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작품은 <왓치맨>(2009)이다. 앨런 무어의 고전적인 그래픽 노블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놓는 것만이 지상 과제로 보였던 이 작품은, 연출 과정에서 다소간의 취향이 반영됐던 <300>과는 달리, 원작의 맥락과 장면이 거의 손상되지 않고서 재현됐다. 이 또한 감독의 단순 팬심이라고 보기에는 시원찮다. 어째서 그는 원작의 맥락에 손도 대지 않았을까.

<왓치맨>은 미국 슈퍼 히어로물의 대주제를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왓치맨>의 주제는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로 요약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문장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간파한 사람은 오직 그 메시지를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잭 스나이더 외에는 찾아보기 힘든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힘의 '사적' 사용에 대한 문제다. 히어로들은 본질적으로 무법자이다. 아무리 그들이 영웅 행세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법을 어기고 무단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범죄자들과 다르지 않는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악을 미워하는 그들의 신념뿐이다. 그렇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어떻게 그 신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봤을 때, 로어셰크는 난폭하고 무식하고 자격지심에 가득 차 있는 사이코패스일 뿐일 수도 있다. 수사를 위해 범죄자들을 고문하고 복면을 쓴 채로 사유지를 침범하는 그의 모습이 범죄자와 뭐가 다르겠는가. 히어로를 법제화하는 킨 법령의 제정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니, 미국 사회에 비추어 봤을 때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대표적으로 <시빌 워>(시공사)의 초인등록법안이 있고, 잭 스나이더 영화에서 슈퍼맨이 지속적으로 소환당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지만 마블의 아버지인 스탠 리가 참여했고 미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히어로맨>(2010)에서도 어김없이 소년에게 주어진 로봇의 귀속문제로 국가와 개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일본의 용자물과 달리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선 언제나 미군의 역할이 일정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미국 사회에서 악과 독자적으로 싸우는 존재는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이 건국 이래로 지켜온 전통이다.

미국은 사회계약론이 문자 그대로 국가 성립의 원리로 이어진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 구체적으로 로크의 경우는 미국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정치이론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1620년 메이플라워 서약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은 아래에서부터 '합의'와 '계약'으로 차근차근 국가를 성립해 나갔다. 영국 왕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13개 주는 공화주의와 연맹의 원리에 따라 서로의 자유를 구성하고 입법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미국이라는 정치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한길사, 2004)에서 이러한 미국의 혁명이야말로 단지 군주가 대중으로 대체되었을 뿐인 프랑스 혁명이나 영구 혁명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러시아, 중국의 혁명과 구분되는 진정한 혁명이라 밝히고 있다.

"혁명의 목적은 자유이고 반란의 목적은 해방이다."

이 말에서 자유란 구체적으로 정치적 자유, 세계구성(world-building)능력을 지닌 정치 주체가 권력을 구성할 자유를 뜻한다. 역사를 배운 미국인에게 자유는 필연적으로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300>의 스파르타인이 말하는 자유는 한국의 애국보수 집단이 입에 달고 다니는 자유와도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스파르타 시민권자들의 폴리스 내에서 정치 영역을 확보할 자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이 없는 한국에서 자유는 단지 반공 수사에 그칠 뿐이다. 스파르타인도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한국군도 공산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후자는 언제까지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단지 무시무시한 위협에 맞서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것과 충성심 이상이 아니었으며, 전투 참여자들은 그 어떤 정치적 결사도 형성하지 못했고 오히려 전후 공신 책봉을 받은 사람들은 주로 '왕'의 곁에서 왕을 지키는 데 몰두한 사람들이었다.

<왓치맨>에서 히어로들을 자경단원, 혹은 코스튬 히어로로 격하시키고 또 그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은 단순히 그들이 위험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들을 공적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미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배트맨과 고담의 각종 슈퍼 빌런의 프리퀄을 다룬 드라마 <고담>(2014)에서는 공적 질서, 즉 치안과 법적 정의가 소멸한 사회를 다루고 있다. 이 묵시록적인 드라마에서는 너무도 뻔한 메시아의 등장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면서 나름의 미봉책을 제시한다. 팔코니의 존재가 그것인데 안전한 예속이 불안전한 자유보다 낫다는 홉스의 견해에 따라 고담의 시민들, 그리고 형사 고든은 이 갱스터의 위력에 의한 질서에 동의한다. 이것은 홉스식 사회계약론의 완벽한 예시라 할 수 있다.

<다크나이트>가 던진 중요한 질문

 영화 <다크 나이트>

전무후무한 슈퍼 히어로 영화 <다크 나이트>.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하비 덴트의 관계와 상징은 매우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지금 시대 가장 위대한 슈퍼 히어로 무비인 <다크 나이트>(2008)는 정확히 이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미 고담은 팔코니의 지배를 받는 도시였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 보기에 그것은 악을 용인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발한 생각을 해내는데, 바로 상징을 도입한 것이었다. '악'에게 던져주는 공포의 상징, 바로 '배트맨'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선일 뿐, 제도적 질서는 아니었다. 악에 대한 공포의 상징이었던 배트맨은 조커라는 또 다른 상징을 만나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적인 선은 결국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결국 그의 선택은 '질서'였다. 하비 덴트를 법질서의 상징으로 치켜세우고 자신은 마침내 '다크 나이트' 즉 용인 받을 수 없는 무법자의 위치로 내려서는 것.

결국 <왓치맨>에서도 모든 개별 의지는 부정되고 만다. 신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능력을 지닌 닥터 맨하탄 역시 오지맨디아스가 꾸민 '대의'를 수긍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한다. 만일 이 개별 영웅들의 영웅 심리나 의지, 도덕성이 공적인 정의와 대립하는 것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이 작품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슈퍼 히어로'물이기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공적 사회의 입장에서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단지 '자경단원'일 뿐이었다.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행위가 배제된' 존재들이며 따라서 시민적 자유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잭 스나이더가 텍스트의 재현에 집착한 이유는 확실해졌다. 그는 <300>에서 자유의 신화를 먼저 다루었고 <왓치맨>에서 히어로의 본질을 건드렸다. 엄밀히 말해 <왓치맨>에서는 사적 정의와 공적 질서의 충돌 자체는 다루지 않고 있다. 정확히 그것은 사적 선이 패배하고 최종적으로 완전히 짓뭉개지는 이야기이다. 이제 잭 스나이더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어디겠는가. 그가 <맨 오브 스틸>(2012)의 감독이 된 것은 천만 다행인 일이었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슈퍼맨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의 소유자이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슈퍼맨은 사적인 선을 행함과 동시에 결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을 가진 존재다. 이보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 말하자면 그는 기적을 일으키고 다니는 무면허 의사와도 같은 존재다. 우리는 그가 가진 서사를 통해 그의 선의를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 그의 성장과정, 남들보다 뛰어난 힘을 가졌고 그래서 고통 받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너에게 그런 힘이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널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너를 드러내지 말거라."

클라크는 아버지로부터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어릴 적부터 평생 동안 이 초월적인 힘을 통제하면서 살아왔다. 그가 얼마나 자기 원리에 충실한 인간인지 여기서부터 우리는 추론해내야만 한다. 결정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클라크의 도움을 거절하고 토네이도에 휩싸여 죽는다. 이 사건이 클라크에게 어떻게 각인됐겠는가.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고전적인 초자아를 형성하도록 한 불멸의 대상이다.

 영화 <맨 오브 스틸>

영화 <맨 오브 스틸>을 봤다면, 슈퍼맨이 왜 그토록 아버지에게 의지하는지, 왜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의 환영에게 자문을 구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에게,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산 위에서 아버지를 만난 신은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장면은 클라크 켄트의 내면을 대변하는 일관된 신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그는 고민할 때엔 아버지에게 뜻을 묻는다. 다른 평범한 아들들처럼. 그가 고지식하리만큼 순진하고 헌신적인 데 이 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하지만 그 사정을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어디까지나 그의 선행은 사적인 것이고 관객과 은밀히 공유하는 비밀일 뿐이다. <맨 오브 스틸>에서부터 그는 그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했고 따라서 청문회에 출두하게 된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슈퍼맨을 두고 벌어지는 모든 논쟁은 이 맥락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극장판의 패착은 지나치게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왓치맨>을 의식한 편집 때문이었다. 슈퍼맨을 두고 벌어지는 청문회, TV 토론, 뉴스, 그를 기념하는 조형물 등을 병렬로 보여주는 기법은 명백히 <다크나이트 리턴즈>를 겨냥한 것이었다. 감독은 그를 둘러싼 논란, 바로 뜬금없이 등장하여 사적으로 선을 행하는 존재에 대한 의심과 토론이 이 서사의 본질이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견 옳았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에 접목되니 지루함을 낳았고, 관객은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헤매고 말았다. 감독판에서 수정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감독판에서는 로이스의 비중이 부쩍 늘어났으며 영화의 중심을 조금이나마 그의 취재행 동선에 맞추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그 결과 로이스 인질 사건을 비롯하여 몇몇 답답했던 인과가 드러났으며 영화 구성으로서도 제법 매끈해졌다. 그렇지만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메시지는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감독은 결코 여기서 타협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의 대화는 히어로물의 중요한 딜레마를 드러낸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배트맨 등장 부분 역시 그렇다. 밴 애플랙이 연기한 배트맨은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처럼 피해의식에 가득 차 있고 미처 풀리지 않은 한과 울분을 범죄자들에게 투사하는 광적인 배트맨이다. 그는 알프레드에게 말한다.

"우린 범죄자예요. 예나 지금이나 그건 변함없죠."

감독판에서는 괴물이 되어가는 배트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배트맨은 범죄자를 붙잡고서 낙인을 찍는다. 당연히 그것은 범죄자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담긴 사적인 복수일 뿐이다. 언론사들 역시 그것을 기삿거리로 낼 정도이고, 낙인찍힌 범죄자가 감옥에서 살해당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한데도 배트맨은 그것을 감행한다. 어째서 그렇게 됐을까. 그는 지금까지 배트맨 무비와는 달리, 이 히어로 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나이 든 영웅이다.

"범죄자들은 잡초와 같아요. 뽑아도 계속 자라나죠."

그는 게다가 조커(와 할리 퀸)에게 로빈을 잃은 경험까지 있다. 이후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사건이 브루스에게 적잖은 좌절감과 실망감을 줬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실패한 배트맨이다. 그는 지쳐 있었다. 아마도 초기에는 갖고 있었을 살인하지 않는다는 계율, 사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기 원리를 그는 거리낌없이 어기고 있었다. 아마 낙인 역시 그 계율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무력해 보였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로빈은 죽었다. 몇 대 로빈인지, 정확히 어떤 로빈인지 알 수 없지만 조커에 의해(그리고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면 할리 퀸도 공범이다) 살해 당했다. 배트맨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감독판에만 추가된 몇몇 장면들

브루스의 슈퍼맨에 대한 불신은 말하자면 자기 혐오였다. 그는 크리스찬 베일의 브루스와는 달리 하비 덴트를 만나지 못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고든 국장도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고든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점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법을 수호하는 입장에서 남몰래 배트맨에 협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공적 질서와 사적 선의 타협점이자 배트맨 입장에서는 복수의 폭주를 막아줄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배트 시그널을 가진 고든은 그야말로 견제와 균형의 상징이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본래 고든 국장이 날렸어야 할 배트 시그널. 고든의 부재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에 큰 변화를 줬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당연히 공적 사회에서 그의 행적이 밝혀지면 파면감이다. 그렇지만 배트맨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사적으로나마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주고 심지어 살인까지 막아주는 존재다. <배트맨 허쉬>(세미콜론, 2008)에서 슈퍼맨은 배트맨에게 크립토나이트를 넘기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무소불위의 무력을 지닌 슈퍼맨은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힘은 언제나 부패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친구였던 브루스에게 자신의 견제를 맡긴 것이다.

영화 속에서 브루스와 알프레드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적일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 없애야 해요."
"그는 적이 아니에요."
"지금은 아니죠. 영원히 착한 사람은 없어요. 고담에 착한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죠?"

이 영화에서 그는 고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다. 그는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와중 슈퍼맨이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방치하면서까지 조드와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제와 균형이 없는 힘은 위태롭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질투였다. 20년간의 영웅놀이는 보상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로빈마저 잃었다. 억눌리고 억눌렸다. 트라우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면을 썼지만 그 응어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슈퍼맨이 나타났다. 정체불명의 외계인.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슈퍼스타. 도대체 무슨 설명이 부족하단 말인가.

이 싸움이 단순히 렉스 루터의 음모에 의해 벌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루터는 단지 부추겼을 뿐이다. 진짜 문제는 배트맨과 슈퍼맨 자신에게 있었다. 슈퍼맨의 동선을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일 테니 생략하도록 하자. 다만 감독판에서 추가된 몇몇 부분이 본편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쉽기만 하다. 감독판에서 슈퍼맨 역시 배트맨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클라크가 배트맨의 폭주를 취재하는 장면이 추가됐는데, 이는 영화 속에서 꼭 필요한 장면들이었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감독판에 추가된 장면에서, 클라크 켄트는 배트맨의 뒤를 쫓으며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선'인지 묻는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클라크는 취재 도중 배트맨의 낙인 때문에 감옥에서 살해당한 산토스의 아내를 만난다. 그는 클라크에게 말한다.

"판사는 배트맨이에요. 한 사람이 누가 살고 죽을지를 정한다니 그게 어떻게 정의죠? (중략) 그런 사람은 글로 막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막는지 아나요? 주먹이에요."

이 지나가는 인물 역시 클라크에게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을 묻고 있었다. 그들을 부추김질한 것은 루터 혼자만의 일이 결코 아니었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배트맨의 타락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 모른다. 다음 작품을 위해서라도.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나는 감독이 이런 거대한 이론적 흐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얼마든지 댈 수 있다. 가장 노골적인 단서는 바로 청문회에서 핀치 상원의원의 연설이다. 감독은 교묘하게도 이 연설을 이후 이어지는 사건에 덧붙임으로써 일종의 맥거핀처럼 활용해 그 내용에서 금세 주의를 돌려버린다. 아마도 설명조의 영화가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 내용을 다시 음미해보자.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청문회 장면에서 의원이 연설하는 장면은, 잭 스나이더가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민주주의가 바로 이런 거죠. 우리는 대화를 하고 상호 합의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전에도 말햇지만 개인의 독단적 행동은 용납되지 않아요. 거짓말도요. (중략) 우리가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고…."

이렇게 감독의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또 있을까. 이때 슈퍼맨의 등장 신은 호흡을 잊어버리고 모든 시각세포를 휘어잡아버릴 만큼 강렬하다. 의사당 위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잡힌 슈퍼맨. 마치 강림한 천사와도 같은 숭고한 모습. 과거 진중권은 <300>을 보고 이미지가 텍스트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이미지를 범람시켜 그 이미지 자체가 어떠한 메시지를 대체하는 연출은 잭 스나이더의 특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슈퍼맨은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다. 그 미장센은 굉장히 훌륭하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이 영화에서도 아주 적절하지 않은가. 화재현장에서 아이를 구하는 슈퍼맨은 아이를 가족의 품에 안겨주고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다. 수재민들은 그들 위에서 유유히 떠있는 슈퍼맨을 올려다본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그는 하늘에서 나타나 모두의 시선을 모은 뒤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다. 이 장면은 직접 보여주지 않고 작중 뉴스 화면과 그것을 보고 넋을 잃은 사람들로 간접화된다. 여기서 한 번. 카메라는 이제 현장으로 가 그의 뒷모습을 의사당과 찬반 시위자들과 함께 화면 한 구석에 작게 잡는다. 이 구도 안에서 그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무언가가 아니라 단지 신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롱 테이크로 계속 비춰준다. 여기서 또 한 번. 그는 인간의 정치 안에 편입된다.

올려다봐야 하는 슈퍼맨의 미장센은 마치 신적인 무언가를 묘사하듯 숭고하기 그지없다. 그런 그가 인간의 청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땅에 내려왔다. 인간이 공적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장소에 말이다. 나는 이 장면을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잭 스나이더야말로 DC의 적자

"모든 싸움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의 홍보 문구를 쓴 워너브라더스코리아의 직원이 영화를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문구는 정확히 영화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맞붙는다! 그 싸움을 앞두고 관객들은 기대에 차 영화관에 들어갔으나, 실망해서 나왔고, 그들도 미처 알지 못한 사이에 그것은 올바른 기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자신이 무법자였기 때문에 또 다른 무법자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또 질투했던 배트맨, 그리고 사적인 선을 실천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외로운 '아버지의 아들' 슈퍼맨. 이들의 싸움에는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감독이 전작들과 수많은 미국식 히어로물에서 논의되던 맥락,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에 의한 영웅의 존재론적 문제에 따르면 흠 잡을 곳 없이 일관된 논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앞서 나는 이것이 다분히 미국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영웅 이야기의 원류를 영웅 신화라 보고 미국의 영웅과 다른 나라의 영웅들을 각각의 유파라고 본다면, 미국 유파는 거의 언제나 이런 맥락을 은연중에라도 깔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영웅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감독판에도 여전히 아쉬운 점들이 있다. 예컨대 렉스 루터의 캐릭터가 그런데, 다음 작품에서는 더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몇 가지 남은 이야기를 해보자. 마사의 문제는 극장판에서도 딱히 문제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독판에서도 끝내 규명되지 않은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렉스 루터에 관한 것. 그가 사실 배트맨의 정체도 슈퍼맨의 정체도 그의 가족관계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역시 조금 안일한 편의주의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건 <다크나이트>의 조커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가 고담을 혼란에 빠트리고 배트맨을 호명하는 '계획'이 지나치게 맞아 떨어지는 문제는 왜 아무도 지적 안 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악당이든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은 계획에는 큰 행운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외하고 렉스 루터는 제법 매력적인 캐릭터다. 깊이가 없다는 비평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나는 이 분량 안에서 그의 아버지(아마도 알렉산더 루터겠지)가 선사해준 열패감을 드문드문 토해내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그의 과거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크나이트>의 조커 역시 단지 그의 역할만으로 캐릭터성을 인정받았잖은가. 그가 지닌 갓 콤플렉스도 차기작에서 충분히 다뤄지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영화 막판에 가서야 본래의 그 '빡빡이'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진짜 이야기는 그 다음일 것이다.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던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에서 배트맨의 행보라든가, 본작의 마지막 신에서 보이는 것처럼 브루스는 심기일전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하려는 듯하다. 이미 차기작에 짐 고든 역으로 J.K.시몬스가 캐스팅 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간단한 예언을 하자면, 차기 배트맨은 다시 히어로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분석해 온 바에 따른 논리적 결론이다. 브루스가 본 환영이 변수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지금 예측·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하지만 잭 스나이더도 알고 있지 않을까. 여기서 배트맨이 달라지지 않으면 이야기는 물론 흥행에도 애로사항이 꽃피리라는 것을. 아무튼 난 감독을 믿는다. 부디 평생 DC 확장 유니버스의 감독으로 부려먹어지기를.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잭 스나이더 감독
배트맨 슈퍼맨 잭스나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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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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