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
철이 든다는 것은철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괴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철이 들면, 가장 먼저 내 안의 못난이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못난 점들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노래를 하나 들었습니다. 바로 이설아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
이 노래를 듣고 나도 모르게 툭툭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소재라며 쓰윽 눈물을 한 번 훔치면 그만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왜일까요?
소년, 소녀 그 아름다웠던 시간
▲ 악몽을 잡아준다는 '드림캐쳐'. 그것이 악몽일지언정 진정 꿈이라면, 그 꿈을 붙잡고 싶다. ⓒ shydesigns.com
1월 1일, 우리 가족은 동생이 있는 제주도에 놀러 갔습니다. 부모님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여행을 많이 하자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해의 시작, 뭔가를 결심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저도 그 분위기를 타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아보자! 그리고 그 첫 번째를 여행 둘째 날 밤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엄마, 아빠의 꿈은 뭐였어?"뜬금없는 제 질문에 엄마는 어색한 표정으로 약간의 쑥스러움을 곁들여 말을 꺼냈습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소녀였던 시절, 엄마는 멋진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예쁜 옷 보다는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는 우리 엄마가 디자이너를 꿈꿨다니. 매우 의외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났습니다. 어쩌다 한 번 새 옷을 사면, 엄마가 항상 했던 행동이. 집에 오자마자 엄마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앞에서 나름의 패션쇼를 해보였습니다. 옷장에 있는 다른 옷과 잘 어울리는지 보기 위해 이렇게도 입어보고, 저렇게도 입어보며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뒤 들려오는 소리.
"어때, 잘 어울려?"그 때는 그게 어찌나 귀찮던지. "예뻐"라며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습니다. 디자이너는 되지 못했지만, 그렇게 나마 옷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의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같은 질문을 아빠에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심을 갖지 못했던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그날따라 왜 그리 슬프게만 느껴지는지요.
"상고에 진학해서 은행원이 되고 싶었어."아빠는 상업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그조차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둔 아빠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가야만 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기술을 배우기 싫었다며, 그 때를 회상하는 아빠. 그렇게 싫었던 일을 40년 넘게 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때려치우고, 내 꿈을 찾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린 날. 혼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꿈을 포기했어야만 했던 아빠였기에 자식에게는 차마 그러지 못하신 것은 아닐까, 바보처럼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부모님은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했을까. 그래서 나의 꿈을 붙잡지 않았던 걸까. ⓒ 공윤희
낡은 흑백사진 한 장몇 달 전,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이 이사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집 중 가장 좋은 집이었습니다. 저는 짐 정리를 하러 날을 잡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방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짐들을 하나씩 풀어 헤치던 중,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엄마, 아빠의 어릴 적 사진.
친구들과 놀러를 갔는지, 귀를 덮을 정도로 긴 머리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아빠는 한쪽 다리를 기억자로 세우며 한껏 포즈를 잡고 있었습니다. 3센티미터 정도 되는 짧은 머리에 피부가 까맣게 탄 지금의 아빠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삼류 영화관 갈 때, 나는 그래도 좋은 영화관 다니고 그랬어.""아빠 멋쟁이였네"라는 말에 아빠가 나름의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빠는 나름의 멋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나처럼.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또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엄마의 흑백 사진. 엄마는 살이 안찌는 체질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스물 살 무렵 엄마는 통통한 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빠글빠글한 파마머리가 아닌, 단발머리를 한 엄마를 봤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들고 엄마가 있는 거실로 달려갔습니다. 이 사진을 본 엄마는 말했습니다.
"이런 사진도 있었네."
▲ 낡은 흑백사진이 건져 올린 추억. 그립고, 보고 싶지만, 돌아갈 수는 없는 그 순간이 기록됐다. ⓒ 공윤희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생각났는지, 엄마는 그 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집에 사진기가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사진관에 갔던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섯 명의 소녀들이 똑같은 포즈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봤었나 봅니다.
"이 친구들 보고 싶다."연락이 끊긴 지 40년, 엄마는 친구들이 생각났는지 한 없이 그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
▲ 엄마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엄마도 한때는 소녀였을 것이다. ⓒ 10wallpaper.com
노래 가사는 매우 간단합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오는 아들에게 "밥은 먹었어?"라고 엄마가 묻자, 아들은 거기에 대고 "피곤해"라며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엄마는 밉지도 않은지 곧바로 과일을 내옵니다. 이 모습에 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못내 후회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를 키우느라 자기를 버리고 사는 엄마에 대해.
하늘에 남색 빛이 도는 저녁,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수신자 엄마. 엄마는 '밥 먹었어'를 시작으로 이것 저것 묻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든 저의 반응은 여전히 변덕스럽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미주알고주알 말을 잘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피곤하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전화를 일찍 끊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후회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
여전히 많이 부족한 딸입니다. 부모님이 소년, 소녀였던 시절,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도, 나보다 더 멋쟁이였던 열정과 끼가 그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사실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훔치고도 아직도 툴툴대는 그런 딸입니다.
그래도 하나 약속 할 수 있는 것은, 퉁명한 목소리보다는 재잘대며 이야기하는 날이 더 많아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 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행복한 일임을 알려줄 수 있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내일은 꼭 제가 먼저 전화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