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철이 든다는 것은

철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괴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철이 들면, 가장 먼저 내 안의 못난이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못난 점들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노래를 하나 들었습니다. 바로 이설아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

이 노래를 듣고 나도 모르게 툭툭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소재라며 쓰윽 눈물을 한 번 훔치면 그만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왜일까요?

소년, 소녀 그 아름다웠던 시간

 공모전 기사 사진.

악몽을 잡아준다는 '드림캐쳐'. 그것이 악몽일지언정 진정 꿈이라면, 그 꿈을 붙잡고 싶다. ⓒ shydesigns.com


1월 1일, 우리 가족은 동생이 있는 제주도에 놀러 갔습니다. 부모님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여행을 많이 하자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해의 시작, 뭔가를 결심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저도 그 분위기를 타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아보자! 그리고 그 첫 번째를 여행 둘째 날 밤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엄마, 아빠의 꿈은 뭐였어?"

뜬금없는 제 질문에 엄마는 어색한 표정으로 약간의 쑥스러움을 곁들여 말을 꺼냈습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

소녀였던 시절, 엄마는 멋진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예쁜 옷 보다는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는 우리 엄마가 디자이너를 꿈꿨다니. 매우 의외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났습니다. 어쩌다 한 번 새 옷을 사면, 엄마가 항상 했던 행동이. 집에 오자마자 엄마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앞에서 나름의 패션쇼를 해보였습니다. 옷장에 있는 다른 옷과 잘 어울리는지 보기 위해 이렇게도 입어보고, 저렇게도 입어보며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뒤 들려오는 소리.

"어때, 잘 어울려?"

그 때는 그게 어찌나 귀찮던지. "예뻐"라며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습니다. 디자이너는 되지 못했지만, 그렇게 나마 옷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의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같은 질문을 아빠에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심을 갖지 못했던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그날따라 왜 그리 슬프게만 느껴지는지요.

"상고에 진학해서 은행원이 되고 싶었어."

아빠는 상업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그조차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둔 아빠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가야만 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기술을 배우기 싫었다며, 그 때를 회상하는 아빠. 그렇게 싫었던 일을 40년 넘게 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때려치우고, 내 꿈을 찾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린 날. 혼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꿈을 포기했어야만 했던 아빠였기에 자식에게는 차마 그러지 못하신 것은 아닐까, 바보처럼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공모전 기사 사진.

부모님은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했을까. 그래서 나의 꿈을 붙잡지 않았던 걸까. ⓒ 공윤희


낡은 흑백사진 한 장

몇 달 전,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이 이사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집 중 가장 좋은 집이었습니다. 저는 짐 정리를 하러 날을 잡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방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짐들을 하나씩 풀어 헤치던 중,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엄마, 아빠의 어릴 적 사진.

친구들과 놀러를 갔는지, 귀를 덮을 정도로 긴 머리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아빠는 한쪽 다리를 기억자로 세우며 한껏 포즈를 잡고 있었습니다. 3센티미터 정도 되는 짧은 머리에 피부가 까맣게 탄 지금의 아빠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삼류 영화관 갈 때, 나는 그래도 좋은 영화관 다니고 그랬어."

"아빠 멋쟁이였네"라는 말에 아빠가 나름의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빠는 나름의 멋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나처럼.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또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엄마의 흑백 사진. 엄마는 살이 안찌는 체질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스물 살 무렵 엄마는 통통한 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빠글빠글한 파마머리가 아닌, 단발머리를 한 엄마를 봤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들고 엄마가 있는 거실로 달려갔습니다. 이 사진을 본 엄마는 말했습니다.

"이런 사진도 있었네."

 공모전 기사 사진.

낡은 흑백사진이 건져 올린 추억. 그립고, 보고 싶지만, 돌아갈 수는 없는 그 순간이 기록됐다. ⓒ 공윤희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생각났는지, 엄마는 그 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집에 사진기가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사진관에 갔던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섯 명의 소녀들이 똑같은 포즈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봤었나 봅니다.

"이 친구들 보고 싶다."

연락이 끊긴 지 40년, 엄마는 친구들이 생각났는지 한 없이 그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

 공모전 기사 사진.

엄마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엄마도 한때는 소녀였을 것이다. ⓒ 10wallpaper.com


노래 가사는 매우 간단합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오는 아들에게 "밥은 먹었어?"라고 엄마가 묻자, 아들은 거기에 대고 "피곤해"라며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엄마는 밉지도 않은지 곧바로 과일을 내옵니다. 이 모습에 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못내 후회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를 키우느라 자기를 버리고 사는 엄마에 대해.

하늘에 남색 빛이 도는 저녁,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수신자 엄마. 엄마는 '밥 먹었어'를 시작으로 이것 저것 묻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든 저의 반응은 여전히 변덕스럽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미주알고주알 말을 잘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피곤하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전화를 일찍 끊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후회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

여전히 많이 부족한 딸입니다. 부모님이 소년, 소녀였던 시절,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도, 나보다 더 멋쟁이였던 열정과 끼가 그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사실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훔치고도 아직도 툴툴대는 그런 딸입니다.

그래도 하나 약속 할 수 있는 것은, 퉁명한 목소리보다는 재잘대며 이야기하는 날이 더 많아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 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행복한 일임을 알려줄 수 있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내일은 꼭 제가 먼저 전화 드리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OOO' 응모작입니다.
소년, 소녀 부모님 엄마로 산다는 것은 철이 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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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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