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반복되듯 영화도 반복된다. 2015년 <킹스맨>이 찌질한 엘리트들의 머리를 폭죽마냥 신나게 터뜨리는 '희극'을 선보이기 10여 년 전, 2005년에는 장엄하고 웅장하게 부패한 권력의 상징을 터뜨리는 <브이 포 벤데타>의 '비극'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웅장한 '1812년 서곡'이 울려 퍼지는 그 축제의 현장에는 수많은 가면을 쓴 '브이(V)'들이 그들의 가면을 벗고 담담하게 역사적 현장을 바라본다. 모두는 곧 V(브이)고 V는 곧 모두임을 나타내는,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리는 연출. 그리고 거기에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고든' 역시 한 명의 V로서 함께하고 있다. 지금부터의 글은 영화 속에서 당당히 그 현장에 있었던 주연 같은 조연, 고든을 위한 것이다.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던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브이 포 벤데타>는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워너 브라더스


<브이 포 벤데타>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DVD를 사서 7번이 넘게 돌려본 영화였다. 가이 포크스 가면 뒤에 낮고 섹시하게 깔리던 V 역의 휴고 위빙의 목소리가 소위 말하는 '영입' 사유였다면, 충격적인 삭발 신 이후에도 아름다웠던 이비 역의 나탈리 포트만은 한동안 내 마음을 흔들었다. 왠지 모르게 아버지를 연상케 했던 형사 핀치 역의 스티븐 레아도, 악의 축이었지만 묘하게 귀엽게 느껴졌던 챈틀러 셔틀러 역의 존 허트도 이유는 몰랐지만 좋았다. 대사 하나하나가 콕콕 박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브이 포 벤데타>를 인생의 영화로 꼽는 것에는 난관이 많았다. 좋아하는 평론가 박평식은 5점과 혹평을 안겨줬고 다른 평론가들도 뻔하고 진부한 선동영화란 평가를 남겼다. 감독 맥티그의 다른 영화들 - <닌자 어쌔신>이나 <더 레이븐> -에서 보여준 '성과'로 인해 <브이 포 벤데타>마저 폄하 받을 때도 그랬다. 다소 졸립고 늘어지는 듯한 연출이 이어질 때는 스스로 빨리 감아 넘기기도 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브이 포 벤데타>는 영화로써의 완성도는 결코 높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브이 포 벤데타>는 내 청소년기를 지배했고 더 나아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까지 결정했던 그런 영화였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처음 영화를 봤을 때만 해도 잘 보이지 않았던 고든이었다.

웃으면서 '촌철살인' 하다

 디트리히 고든은 조연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다.

디트리히 고든은 조연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다. ⓒ 워너 브라더스


디트리히 고든(스티븐 프라이 분). 방송국 PD. 통통하지만 서글서글한 것이 매력인 그는, 이비의 직장이었던 방송국 선배다. 그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많지 않지만, 주인공 이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은 꽤 많다. 이비가 처음 V를 만나게 되는 것도 고든을 만나러 가는 길의 일이었고, V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결정적인 현장에도 고든이 있었다. 다소 폭력적인 V의 행동이 두려워져 그를 피해 도망간 이비가 다른 형태의 '저항'의 모습을 보며 V를 떠올린 것도 고든의 집에서였다. 결정적으로 이비가 또 다른 V로서 각성하는 계기가 되는, 그 길고 고통스런 과정의 시작에는 이비의 잊혀진 트라우마를 깨운 고든의 최후가 있었다.

동성애자이자 반골이지만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인 방송국 체제 하의 인물인 고든. 그는 V처럼 강렬한 아나키적 폭력 투쟁을 벌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뒤집어 쓴 채 사회를 혼란시키는 적극적인 저항을 벌이지도 않는다. 그는 살짝 비껴나간 채 사람 좋은 웃음으로 지독하게 비극적인 사회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희극인으로 산다. 부족하지 않은 재산, 안정적인 지위. 그는 시스템의 직접적인 수혜를 받는 사람도 아니지만, 시스템에 의해 피해를 보는 사람도 아니다. 그가 평범히 침묵을 지켰다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그의 삶을 잃을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맨 얼굴을 걸고 거부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걸었던 그 일은 역설적이게도 '웃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온 가족들과 사람들이 집과 술집에서 편히 앉아 TV를 볼 수 있는 그 순간, 고든은 자신의 얼굴을 걸고 내보내는 코미디 쇼에서 절대 권력자의 치부를 드러낸다. 저녁에 우유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습관부터 V에 대한 적대감까지, 기묘하게 비틀린 상징화된 인물들로 점철된 그의 쇼는 시종일관 가볍지만 말에 뼈를 담고 있었다. 고든은 쇼 내내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지만, 심각하지 않은 척 옆 사람을 팔꿈치로 툭 치듯 그의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시민들에게 말을 건넨다. '봤지? 이렇게도 할 수 있어' 라고 말이다.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보는 이비의 불안한 표정과는 달리 고든은 느긋했지만, 그가 맞이한 풍자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늦은 밤 군인들은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간다. 그 순간에 함께 있던 이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부모가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침대 밑에 숨어 입을 틀어막고 숨죽인 채로 숨는 것뿐이다. 웃음을 웃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디스토피아에서 고든은 최후에 웃지 못한 채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상식조차 사라진 그 웃음기 없는 작은 균열에서 강력하고 억압적인 세계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면을 쓰지 않고도 V가 될 수 있었던 사람

 고든 캐릭터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고든 캐릭터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 워너 브라더스


단순한 비유와 상징을 쓰는 <브이 포 벤데타>의 세계에서 고든 역시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는 어쩌면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는 시민1 정도의 역할로, 이비라는 '영웅'의 탄생을 위한 조력자에 불과한 배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든은 계기였지만 스승은 아니었다. 그가 이비에게 건넨 음식은 그로 하여금 V의 모습을 연상케 했지만, 고든 자신은 V가 아니었다. 그는, 고든은 V와 같았지만 절대 V는 아니었다. 그의 미미한 저항은 그에게 불행한 최후를 가져다줬지만 그럼에도 그는 V처럼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고든은 가벼운 사람인 듯 세상을 속이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려고 했지만, 그의 분전은 하나의 해프닝처럼 여겨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소시민이었던 불쌍한 고든. 그러나 그의 그 저항이 그토록 인상 깊었던 것은 그로 인해 V가 벌였던 피비린내 나는 복수로만 진행됐던 투쟁이, 비로소 모두의 싸움이라는 더 넓은 차원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V가 보냈던 그 수많은 가면들로 인해 모든 이들이 V가 될 수 있었지만, 정작 고든은 가면을 쓰지 않고도 V로 싸우는 법을 보여줌으로써 모두가 V의 가면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살아있던 그는 영화 내내 가면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보다 V 같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구세계가 끝나는 축제의 순간에 V가 된 대중들 사이에서 가면을 벗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도 V가 될 수 있었던 최초의 V. 고든은 그렇게 V로서 세상을 맞이했다.

비극 아닌 웃음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이비 역을 맡아 열연했다.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이비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워너 브라더스


고든을 보면서, 처음으로 청소년기의 나는 막연히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린 내게 세상을 바꾸는 법, 세상과 싸우는 법이 그토록 강렬하고 비극적인 형태를 띠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준 최초의 사람이 디트리히 고든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억지로 전파하려 하지 않아도, 무조건적 동조나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것 역시 고든이었다. 극 중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에 빠뜨렸던 가장 중요한 매체는 TV였지만, 오히려 그걸 통해 웃음으로도 사람들에게 싸우자는 말을 건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도 고든이었다. 무거운 정언과 경직된 이념이 아닌,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바른 눈과 신념만 있다면 얼마든지 혼자서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건 고든이 최초였다. 

소시민인 난, 겁쟁이였던 난 그렇게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내 목소리로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그를 통해 변화를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싸울 마음만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영화 속 고든은 내게 알려줬다. 마음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대사들이 쏟아지는 영화 속에서 말을 하지 않고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잊혀진 영화의 조그마한 조연에게 끊임없이 응원과 위로를 건네며 내 자신을 달랜다. 내가 V가 될 수는 없다면, 오히려 V보다 더 V였을지도 모를 고든이 되고 싶다. 마치 고든처럼, 움베르트 에코의 책 제목처럼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찾고 싶다. 이렇게 '단조롭고 선동적'인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작지만 큰 인물 고든을 통해 내 삶의 시각을, 내 각오를, 내 마음을, 그리고 나를 바꿨다. 그래서 여전히 소시민인 나는 V가 되려고 애쓰며,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속 고든을 위하여 오늘도 말을 건네 본다. 

고든을 응원해줘, 고든을 위로해줘, 고든을 사랑해줘. V.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제임스 맥티그 디트리히 고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