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대학에서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관련 직종을 택해 2007년 조사연구원이라는 직책을 달고 입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때는 MB정부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던 2010에서 2012년 사이. 수백 수천 년 전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고고학도의 눈에도 돌아가는 형국이 이상했다. 하지만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일은 4대강 공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문화재 조사를 할 지역을 선정하는 작업, 즉 지표조사였다. 이를테면 4대강 사업의 첨병이었다.

나를 힘들게 한 상사 아무개씨

 장기하와 얼굴들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를 좋아한다. ⓒ 두루두루AMC


당시 기세가 대단했던 <나는 꼼수다>를 들으며 분노했지만, 게다가 4대강 사업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은 4대강 사업의 첨병 역할이었다. 이것이 자아를 분열시킬 만도 했으나, 그저 툴툴거리며 열심히 일해 나갈 뿐, 평생직장이라고 여기고 있던 곳을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규직이었고, 먹고 살만큼 월급을 받았고, 5년여 동안 일한 후였기 때문에 일도 손에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정부의 부당한 처사나 정책은 나에게 있어 주요한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발굴조사를 위해 경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곳은 술을 많이, 오래, 자주 먹기로 유명한 아무개 부장이 총괄하는 현장이었다. 그곳에 도착하고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 아무개가 있는 날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회식이 있었다. 회식자리는 곧 아무개의 주도로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성토 자리가 됐다. 뒷담화가 3시간 정도 지나고 나면 하나둘 자리를 뜬다. 그리고 결국 남는 건 아무개와 자리를 슬쩍 뜨는 타이밍을 잘 모르는 나뿐이었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채로 전에 수차례나 했던 이야기를 -그것도 남 험담을- 수십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시계를 보면 새벽 3에서 4시. 숙소로 들어가서 취침을 하자고 말하면 싸늘하게 변한 눈으로 성질을 내던 아무개 부장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짓는 날이 일주일에 4~5일이었다. 평소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나에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나 부당한 일을 가만히 두고 있을 만큼 무심하지 않았다. 아무개 부장의 횡포로 짧게는 수개월 정도부터 길게는 10년 넘게 일하던 직원들까지 사표를 던지는 일이 이어지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실장이 실사를 왔고, 내부고발자의 제보를 통해 아무개의 전횡을 모두 전달됐다. 얼마 후 아무개에게 보직 해임이라는 중벌이 떨어졌고, 그 자리에는 이미 같이 일해 본 바가 있는 부장이 대체하여 들어왔다. 주 5일제 회식은 월 1회로 줄고, 여직원들을 밤새 욕하는 것 -아무개 부장의 회식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여직원일 경우가 많았다- 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분위기에 모두가 익숙해지고 있을 때쯤 놀라운 인사조치가 있었다. 보직해임을 당했던 아무개가 보직해임에서 벗어나 실장으로 승진하였고, 그에게 보직해임을 안긴 기존의 실장은 오히려 직함을 내려놓는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기존 실장의 표면적인 보직해임 사유는 건강상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회사에서 내놓은 핑곗거리였음이 곧 밝혀졌다. 다른 현장에서 기존 실장의 송별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해임사 비슷하게 남긴 말이 직원들에게 파장을 던졌다.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요약하면 "부하직원을 지키려고 한 것이 죄가 되었다"란 말이었다.

부당함 앞에 선 나, 인생의 기로에 놓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때 그 노래'가 내 인생을 바꿨다. ⓒ 두루두루AMC


아무개의 승진 소식은 경주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곧 개선장군처럼 경주로 돌아왔다. 그날의 환영회는 참으로 어색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내 어색함을 풀겠다는 듯 술판이 시작되었다. 달라진 것은, 12시가 다 되면 아무개가 "나는 이제 들어가야 해"라고 말하며 신데렐라처럼 숙소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소에서 맥주 몇 잔 더 하자고 몇몇 친한 직원들을 불러냈다. 

다행히 그가 경주에 상주하진 않았다. 그는 지역 본부장이 아니고 전체 회사를 총괄해야 할 실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각종 핑계를 대며 가능한 자주 경주로 내려왔다. 그의 이동수단은 실장에게 지급되는 고급차량이었고, 기름 값은 법인카드로 냈다. 그는 경주로 오기만 하면 "공금 모아놓은 것이 얼마 남았느냐"는 질문을 했다. -공금이란 직원들이 여비에서 각출해서 숙소에서 사용하는 돈이었다. - 그가 이 모든 걸 누리는 이유는 연구원 창립멤버이고 그중에 원장과 가장 친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랬다.

그때 부당함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치졸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나 자신에게 해로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즈음 건강검진을 받았고, 알콜성 치매의증과 지방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이 33세에 받기에는 가혹한 병명으로 느껴졌다. 그때가 되어서야 퇴사라는 것을 처음으로 떠올렸다.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임금은 동결, 현장이 줄어 연차가 올라갈수록 연봉은 떨어졌다. 각종 복지가 줄어들고 후배들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올라오는 일이 계속 줄어들었다. 비영리 단체임에도 회사 유보금처럼 모아둔 재경비가 200억 가까이 되었음에도 임금은 계속해서 제자리였다.

비극적인 것은 거의 모두가 학연, 지연으로 묶여있어서 부당한 처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문제는 노조가 설립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하소연을 할 곳도 없었다는 것이다. 평생 동안 발굴현장에 남게 될 줄 알았던 나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여기 남아서 부당함을 견디며 조금씩이라도 바꿔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장기하의 '그때 그 노래', 내 직업과 인생을 바꾸다

 장기하와 얼굴들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때 그 노래'의 가사가 인상 깊었다. ⓒ 두루두루AMC


그렇게 복잡한 계산이 머릿속에 뒤얽혀있는 채로 기분 전환삼아 자전거를 타러 나왔다. 2012년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평소 좋아하던 장기하의 새 앨범을 들었다. 그러던 중 흘러나온 '그때 그 노래'라는 곡의 한 소절을 듣고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 자전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격한 감정이었다. 내 눈물을 쏟아내게 했던 소절은 다음과 같다.

"예쁜 물감으로 서너 번 덧칠했을 뿐인데 / 어느새 다 덮여버렸구나 하며 웃었는데 /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 죄다 메꿔야 하는 페인트장이였구나." - 장기하와 얼굴들 '그때 그 노래' 중에서

그 소절이 나에게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는지는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게 하는 효과를 주었던 것은 확실하다. 나는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조그만 일들은 그저 그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당시 여러 가지 일로 작게 쪼그라들어버린 나의 꿈과 이상 그리고 하고자 했던 역할들이 보였고, 이대로 쥐꼬리만 한 월급에 매달려 술이나 퍼마시고 남 욕이나 하다가 아무개처럼 늙어서 치매로 똥칠이나 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생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좀 더 세상에 도움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게 '그때 그 노래'에 담겨 있었다. 그 해 9월에 회사를 관두고 고심 끝에 기자 일을 택했다. 지금은 각종 인터넷 언론에 기사를 송고하며 살고 있다.

물론 매월 15일 월급이 따박따박 나올 때 보다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술을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달려가고, 정부의 각종 부조리에 대한 욕을 빼고는 아무에게도 괜한 욕을 하지 않는다. 할 이유도 없다.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 같이 울고,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 이야기도 영상으로 전한다.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부터,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다. 지금도 가끔씩 장기하의 '그때 그 노래'를 듣지만 그때와 같은 감정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그때보다 행복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장기하와 얼굴들
고고학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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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터넷 언론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사건에 함구하고 오보를 일삼는 주류언론을 보고 기자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로 찾아가는 인터뷰 기사를 쓰고 있으며 취재를 위한 기반을 스스로 마련 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정치, 사회를 접목한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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