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부산행> 포스터. <부산행>은 그냥 그렇고 그런 좀비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부산행> 포스터. <부산행>은 그냥 그렇고 그런 좀비 영화가 아니었다. ⓒ NEW


나는 인류의 종말을 다룬 종말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좀비가 등장하면 더욱 그렇고 영화의 배경이 열차면 더더욱 그렇다. 종말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세상의 파국으로부터 탈출해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오은정의 석사논문(2014)에 따르면 종말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의 좌절·극복을 통해 현실의 불안감을 대리 해소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파멸시켜 더 나은 삶을 새로 시작하고픈 심리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불벼락이 떨어지고 해일이 덮치며 빙하기가 닥쳐오는 끔찍한 장면에서도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필 왜 좀비냐고? 고어물이 좋아서 좀비물을 섭렵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사회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다. 생각해보자. 좀비 얘네들은 감염되기 조금 전만 해도 인격을 가진 인간이었다. 근데 좀 물렸기로서니 몇 초에서 몇 분 만에 맛이 가 서로를 물어뜯는다니. 얼마나 괴이한 설정인가.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좀비 떼들을 통해 자연재해물의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그대로 살리는 동시에 한계를 보완해 영화사적 발전을 이룬 <월드워Z>를 연상시킨다.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좀비 떼들을 통해 자연재해물의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그대로 살리는 동시에 한계를 보완해 영화사적 발전을 이룬 <월드워Z>를 연상시킨다. ⓒ NEW


또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욕망, 공격성, 혐오스러움은 인간 내면에 잠재한 위험 요소를 까발린다. 얼마나 직설적인가. 천재지변이 인간의 책임을 다소 희석한다면 좀비는 책임을 바로 인간에게 귀속한다. 좀비물이 태생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이유다. 또한 <부산행>의 좀비는 '질주하는 좀비'다. 1985년 <바탈리안>에서 좀비가 달리기 시작했고 <월드워Z>나 <부산행>은 본능에 충실한 좀비들이 마치 파도처럼 쏟아지는 시각적 연출을 보태 공포감, 쾌감을 극대화했다. 메시지와 연출을 모두 살린 셈이다.

열차는 '편협한 시각'을 상징한다

나는 <부산행>의 배경이 열차, 그것도 초고속 열차 KTX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한다면 승객은 좌우 이동이 제한적이며 앞뒤 이동만 할 수 있다. 그래서 폐소공포와 전율을 자극한다. 특히 좀비 떼를 뚫고 탈출하는 상황이라면! 그러나 <부산행>의 진가는 그 속도와 공간이 열차가 상징하는 '편협한 시각'과 결합하는 데 있다.

폴 비릴리오는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이 어떻게 사람들의 시각을 편협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한 적이 있다(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참조). 우선 운송수단이 빨라지며 가깝고 먼 거리 개념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이곳저곳 쉽게 다닐 수 있으면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비릴리오는 도리어 공간이 축소(소멸)됐다는 역발상으로 접근한다.

마치 열차의 출발역/시간과 도착역/시간만 중요해져 그 사이의 공간들이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너도나도 '좀 더 빠른 것'을 추구하며, 무한 경쟁을 하고, 결과만을 강조한다. 이런 사회가 되면서 과정을 경시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이다. <부산행>도 트럭 운전사가 도로를 지나다 검역 당국의 방역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운전사가 "또 돼지들 싹 파묻는 거야?"라 묻자 검역 당국은 "근처 공장에서 뭐가 찔끔 샜대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늘 정확한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초기대응, 전시행정으로 문제를 때우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꼬집는다. 한편 항상 바쁜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영화 초반에 누군가와 통화하며 지금 어떤 기업의 주식을 매도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손해를 본다고 우려하지만 결국 지시대로 한다. 부하 직원 김 대리가 자신처럼 똑같이 우려하자 "너는 개미들 생각하며 일하냐?"고 핀잔을 준다. 순응주의를 꼬집는 장면이다. 그런 석우는 행복할까.

 영화 <부산행> 스틸컷. 아이들의 호기심은 때때로 어른들이 못 보는 맥락을 발견한다. 문제는 어른들이 그걸 무시한다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 스틸컷. 아이들의 호기심은 때때로 어른들이 못 보는 맥락을 발견한다. 문제는 어른들이 그걸 무시한다는 것이다. ⓒ NEW


석우는 딸 수안의 학예회조차 자신의 두 눈이 아닌 캠코더로 봐야 할 정도로 바쁘고, 어린이날 선물과 똑같은 생일 선물을 사 올 정도로 무심한 아빠이며, 수안 엄마와도 별거 중이다. 그래서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결국, 부산에 있는 엄마를 만나겠다는 수안에 못 이겨 새벽 KTX에 몸을 싣는다. 열차 출발 직전 무언가(좀비)가 승무원을 덮치는 광경을 보고 이상함을 감지한 수안과 달리 감독이 바로 클로즈업하는 석우는 이미 잠들어 있다.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닥쳤을 때, 김 대리에게 전화를 받은 석우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좀비 창궐이 자신들이 작전을 걸어 살린 유성 바이오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압축 성장이 위험 요소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원죄는 석우만이 갖는 건 아니다.

사회 비판은 클리셰가 아닌 당위다

각자도생. 좀비에 다리를 물린 감염자가 열차 출발 직전 황급히 탔다가 좀비로 변해 승무원을 물어뜯는 것으로 파국이 시작되자 승객들은 정신없이 앞 칸으로 도망친다. 가까스로 문을 닫는데 성공한 생존자들은 각자 살길을 찾는다. 열차 내 TV 뉴스에서 전국 단위의 과격 폭력시위가 일어났다며 곧 진압할 테니 안심하라는 말이 나온다. 정부의 상투적 발언을 그대로 믿고 "나라 어지럽게 왜 데모질이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순진함은 어쩐지 익숙하다.

가족과의 연락이나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사람들의 모습도 익숙하다. 정작 힘을 모아 방법을 찾아보자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석우조차 민 대위에게 대전역에 내리면 격리되지 않게 따로 빼달라는 연락을 하고, 용석(김의성)은 천리마 고속 상무라 전국적인 정보를 얻지만 승객들과 공유하지 않는다. 단순히 개인의 인성 문제(개인 일탈)로 환원할 수 없다. 좀비 창궐 이전에도 존재해온 사회적 부조리를 충실히 반영하는 연장선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내는 건 종말 영화, 특히 좀비물이라면 클리셰(진부한 소재나 표현 등)가 아닌 당위다. <부산행>의 신선함은 이러한 당위를 '열차'와 '시선'에 결합시키는 표현력에서 찾아야 한다. 가령 승객들은 천안역을 무정차로 통과할 때 창밖에서 살려달라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바라본다. 천안역은 누군가에게는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잠이 들었다면 지나치는지조차 모를 공간일 수 있다.

이런 공간이 위기에 닥쳐서야 눈에 들어온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는 꼬집는다. 한편 대전역에서 잠시 내린 승객들이 군대마저 좀비가 된 걸 보고 아비규환에 빠지는 장면을 보자. 아직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소시민적 기대조차 무참히 박살낸다.

 악역인 용석을 마냥 욕할 수는 없다. 그 역시 나름의 사정이 있는 사람이고, 시스템 속에 매몰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최후가 애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악역인 용석을 마냥 욕할 수는 없다. 그 역시 나름의 사정이 있는 사람이고, 시스템 속에 매몰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최후가 애잔한 이유 중 하나이다. ⓒ NEW


이 순간 자신이 미리 알았던 정보를 승객들과 공유하지 않고 위험에 빠뜨렸으면서도, 빨리 열차를 출발시키라고 승무원을 다그치며 뻔뻔하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살아야 할 거 아냐!"라고 용석은 외친다(관련 기사 : 권석천, <채널예스>, "<부산행> 아저씨들의 세상은 위험하다"). 대합실 유리창을 박살내며 승강장으로 해일처럼 쏟아지는 좀비 떼는 어디든 마음 편히 머물 공간을 찾기 힘든 현실을 잘 반영한다. 그렇다면 <부산행>에 희망의 계기가 전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어쨌든 필름을 계속 돈다.

석우에게 "아빠는 자기 밖에 몰라, 그래서 엄마도 떠난 거잖아요"라고 말하는 수안과, 자신과 수안을 구해준 상화(마동석) 덕분에 석우는 억눌러온 인간성에 눈을 뜬다. 그래서 대전역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탈출하도록 힘을 합치고 가까스로 다시 열차에 탑승해 목숨을 걸고 좀비 떼를 뚫고 앞 칸과 합류하려고 한다. 이때도 어김없이 열차라는 공간과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계속 부각된다.

좁은 공간 안의 또 좁은 공간, 가령 화장실과 의자 아래 등에 숨어 좀비를 훔쳐보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비릴리오에 따르면 산업혁명뿐 아니라 정보혁명에도 편협한 시각 문제는 도드라졌다. 초고속 인터넷은 사람들이 서로의 소소한 일상까지도 스마트폰 액정과 모니터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인간관계와 정보가 단편적이고 탈 맥락적이라 서로를 구체적인 인격체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며 서로를 물어뜯는 일이 만연하기에 사람들은 '자기 검열'을 하고 서로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부산행>의 좀비들도 시력이 좋지 않고 청각에만 예민하다. 그래서 석우 일행은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 상화의 휴대폰 벨소리('오 필승! 코리아')를 이용해 좀비들을 유인하며 위기를 극복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은 캐릭터에 관객이 이입을 했다는 증거다. 일행이 잠시 숨을 돌리자 석우가 "벨소리가 그게 뭡니까"라고 묻자 상화는 "벨소리가 뭐 어때서? 벨소리 어떻게 바꾸는 거냐?"라고 엉뚱하게 반문한다.

월드컵의 감수성을 간직하지만 조금 구식인 터프가이는 석우에게 조언도 해준다. 아빠들이 인정을 잘 받지 못 하지만 남자는 원래 그런 것이며 사회생활하면서 참고 희생하다 보면 언젠가 이해해줄 날이 올 거라고. 그러나 어쨌든 상화는 부산으로 함께 가지 못 하고 결국 좀비에 물린다. 관객들은 탄식하고 인터넷에는 상화가 너무 빨리 물렸다는 글이 올라온다.

우리를 좀비보다 더 좀비 같이 만드는 '불신'

 상화는 석우보다 많은 이입을 이끌어낸 캐릭터다. 훤칠하고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보다 험상궂은 동네 아저씨 같지만 듬직하고 귀여운 상화가 더 이입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

상화는 석우보다 많은 이입을 이끌어낸 캐릭터다. 훤칠하고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보다 험상궂은 동네 아저씨 같지만 듬직하고 귀여운 상화가 더 이입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 ⓒ NEW


종말영화이기에 등장인물들이 위기마다 희생되는 장르적 특성이 있다. 하지만 러닝타임이 짧다는 걸 감안해도, 관객의 체감상 상화가 물린 타이밍은 빠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는 감독의 미숙함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그 상황에 잘 맞는 스토리 진행이다. 상화가 감염되기 직전 어떤 장면이 등장하는지 생각해보자. 현실은 상화의 기대만큼 녹록지 않다.

석우 일행이 좀비 떼를 뚫고 앞 칸으로 온다는 전화를 받은 진희(안소희)는 앞 칸 승객들에게 소식을 알린다. 그러나 용석에게 선동 당한 승객들은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데 감염됐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어떻게 들이느냐며 반발한다. 석우 일행이 다 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사력을 다해 문을 막는다. 좀비보다 광기에 휩싸였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결국 시간이 지체돼 상화는 좀비에게 물리고, 만삭의 성경(정유미)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준 뒤 최후를 맞는다.

혹자는 이 장면이 가부장적 판타지의 임무를 완수하고 떠나는 장면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1차원적인 해석이 아닐까. 역으로 2002년 연대의 경험이나 가부장적 세계관을 토대로, 구원에 이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말자고 하는 것처럼 읽힌다. 상화를 잃고 가까스로 앞 칸에 들어온 석우는 주먹을 날리며 용석에게 따진다. 다 들어올 수 있었는데 왜 문을 막았냐고. 이때 용석의 말이 걸작이다. "이 새끼 감염됐어! 눈 좀 봐봐."

감독은 바로 석우 일행의 눈과 앞 칸 승객들의 눈을 교대로 클로즈 업 한다. 전자는 두려워 보이지만 여전히 맑고 후자는 불신으로 가득하고 탁하다. 그 탁한 눈으로 앞 칸 승객들은 무엇을 봤던 걸까. 이들이 석우 일행에게 빨리 격리되라고 아우성칠수록 <부산행>은 '남자가 여자를 구하고, 여자는 남자의 보호받는' 간단한 가부장제의 공식을 대입해 읽어낼 수 없다. 남자들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여자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불신을 조장하는 용석도 남성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진희의 입을 틀어막는 승무원도 남성이다. 심지어 용석은 동대구역에서 선로가 막혀 열차를 바꿔 타야 한다는 기관사의 방송을 듣고, 탈출하던 도중 진희를 좀비 떼들에게 미끼로 던져 대신 희생시킨다.

한편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인 수안, 성경, 진희가 영화 내내 울기만 하는 게 결코 아니다. 수안은 석우보다 좀비를 먼저 감지했고 석우의 인간성을 일깨웠다. 성경은 좀비들의 시야를 신문지로 가리자 잠잠해진다는 결정적 사실을 발견했다. 진희는 대전역에서 사람들을 더 태우도록 계속 설득한다. 남성중심적 질서가 파국을 맞는 영화에서, 억지로 여성들을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처럼 좀비들 머리 위로 날아다니게 할 필요는 없다.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계속 보여주려는 맥락이 무엇인지, 결국 누가 살아남았는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희망이 최소한 '가부장적 질서'는 아니리라

 부성애와 가족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결코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그 가부장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작품이다.

부성애와 가족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결코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그 가부장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작품이다. ⓒ NEW


한편 인터넷에는 <부산행>의 단점으로 가족주의와 신파성이 짙은 결말을 주로 꼽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감독이 흥행을 위한 타협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 진부한 장면들을 연출했는데, 이게 오히려 사회 비판적 시각이 흐려졌다는 평가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지난 3일 <무비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신파는 선택이 아닌 당위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가족이라는 이슈를 가져온 이유는 우리가 지금 딛고 있는 사회는 굉장히 비관적이고 힘든 세계다. 이런 비관적인 세계에서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기댈 수 있는, 이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는 최소단위가 가족이라 생각한 거다." - 박은영, <무비스트>, "가족 얘긴 신파가 아니라 당위다" 중에서

흥미로운 건 최악의 악역 용석조차 부산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대구역에서 KTX의 선로가 막혀 속도가 느린 열차로 갈아탄(속도가 빠른 KTX는 구원의 세계로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비릴리오의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석우, 수안, 성경은 감염이 시작된 용석과 마주친다. 이때 용석은 마치 아이처럼 무섭다며 자신의 이름과 부산의 집 주소를 이야기하는 퇴행 현상을 보인다.

용석의 내면에도 작은 아이가 살고 있고, 집에서는 좋은 아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존 공포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을 수없이 해쳐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석우는? 석우도 원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감독은 석우와 용석의 경계조차 무너뜨린다. 석우는 용석을 열차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자신도 용석에게 물려 감염이 시작된다.

다만 석우는 아빠와의 이별을 예감한 딸 수안에게 떠나지 말라는 사랑 고백을 받는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인정을 받고 석우는 미소를 지으며 선로에 몸을 던진다. 하지만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는 이 장면은 여전히 숭고함보다는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상화, 용석, 석우의 가족주의 중 무엇도 구원의 세계와 함께할 수 없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는 <부산행>의 최후 생존자가 수안과 성경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안은 석우와 달리 맥락을 볼 수 있었고 성경의 아이는 새로운 세대를 상징한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결말에도 '편협한 시각' 문제는 계속 암시된다. 멀리서 걸어오는 성경과 수안의 실루엣만 보고 군인들은 좀비인지 생존자인지 분간하지 못해 사살할 뻔 한다. 수안이 망국의 슬픔을 담은 '알로아오에'를 부르자 그제야 인간임을 알아본다. 이 장면은 두 여성이 결국 남성들의 질서로 돌아갔다고 1차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군인들이 유사시에 방어선을 지키는 설정은 리얼리티의 충실한 반영이다. 중요한 것은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부산조차 '편협한 시각' 문제는 남아있고 대안을 찾으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암시가 있다는 점이다. 감독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아포칼립스(세상의 종말)를 다룬 작품에서는 세대 간 교체가 중요한 이슈다. (중략) 지금 세대는 남성 중심 세대라 생각해서 새로운 세대는 여성 중심이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에 그렇게(여성인 수안과 성경을 생존자로 설정하는) 결말을 지었다." - 박은영, <무비스트>, "가족 얘긴 신파가 아니라 당위다" 중에서

덧붙이는 글 이 리뷰는 '내가 사랑한 ○○○' 공모 응모작입니다. <부산행>의 프리퀄인 <서울역>이 이달 18일에 개봉합니다. 또 다른 종말영화인 <설국열차> 완전 분석 이후, <서울역> 리뷰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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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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