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고 독하게 영화 속의 메시지를 읽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청년의 통통 튀는 감성을 담아 표현하고 소통하겠습니다. [편집자말]
덕혜옹주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조선의 마지막 옹주이다. 그녀는 일본의 내선일체와 민족말살정책에 의해서 일본인 학교를 다녀야 했고 영친왕의 뒤를 이어 일본으로 유학까지 떠나야 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덕혜옹주는 고국을 떠나 적국인 일본의 땅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후, 덕혜옹주는 1945년 해방 이후에 귀국을 희망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의해 귀국하지 못하고 1962년에야 겨우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된다. 37년이란 긴 시간이었던 만큼 덕혜옹주는 사람들에 기억에서 많이 잊혔고 그녀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는 이름처럼 덕혜옹주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덕혜옹주의 삶은 많은 부분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고 영화는 이를 극화해서 구성해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추가되었다. <덕혜옹주>를 감상한 이들의 평이 엇갈리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다.

덕혜옹주에 대해서

 때문에 나는 덕혜옹주의 뒷모습에서 행복보다는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돌아온 조국은 완전하지 못한 조국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나는 덕혜옹주의 뒷모습에서 행복보다는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돌아온 조국은 완전하지 못한 조국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덕혜옹주의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특별하지 않은 편이다. 그녀는 고종이 승하한뒤에 일본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일본인 학교를 다닐 당시에 그녀는 소극적이어서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 의해서 볼모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원치 않는 일본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일본으로 간 그녀는 일본의 정략결혼으로 대마도 백작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인 양귀인을 잃은 슬픔, 고국을 떠나온 슬픔이 컸던것인지 그녀는 조현병에 시달리게 되고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간병하다가 정신병원으로 옮기게 된다.

덕혜옹주는 평생을 소극적으로 살아간 옹주였고 일본에게 계속 휘둘리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비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았지만 황실의 일원인 마지막 옹주였다. 때문에, 일본에 가서도 그녀는 영친왕과 함께 지낼 수 있었고 그 덕에 경제적으로 힘든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의해서 곡식을 수탈당하거나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나 노예처럼 취급받으며 노역을 했을 조선의 민중들의 삶에 비해서는 훨씬 편안한 삶이었다. 덕혜옹주와 같은 조선의 여인들은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갔고 위안부로서 강제로 군인들의 성욕을 감당해야 하는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덕혜옹주를 변호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는 덕혜옹주를 단지 휘둘리기만 했던 비겁하고 나약한 옹주가 아니라 조선인임을 기억하려는 여인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한택수(윤제문 분)이 보낸 기모노를 입지 않고 하녀에게 입힌다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일본 유학생들과 접촉하는 장면, 친일연설을 하는 도중 조선말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등의 장면들이다.

허나, 덕혜옹주는 영화에서도 황실의 일원인 옹주로서의 삶과 평범한 조선인 덕혜로서의 삶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어머니인 양귀인과 연정의 마음이 있는 김장한의 존재는 그녀를 자꾸만 조선인 덕혜로서 살고 싶도록 만든다. 그 약한 부분은 결국 덕혜옹주를 한택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약한 옹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덕혜옹주는 비겁했다.

악랄한 조선인 한택수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한 인물이 있다. 바로 한택수다. 한택수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천황의 편에서 조선 황실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영화의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이완용 등의 친일파들보다도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일본에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친일이란 비극적인 역사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 자신에 적극적인 의지로 인한 선택이다. 한편으로는 굴욕적인 모습도 많다. 조선의 황실 앞에서는 악랄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이던 그는 일본인들 앞에서는 곧바로 비굴한 모습으로 바뀐다.

이런 그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친일파들의 전형적인 변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마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탐욕적인 선택이었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한택수는 탐욕적이고 조국에 대한 고민이 없다.

돌아온 덕혜옹주, 그녀는 행복했을까?

 덕혜옹주는 평생을 소극적으로 살아간 옹주였고 일본에게 계속 휘둘리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비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았지만 황실의 일원인 마지막 옹주였다. 때문에, 일본에 가서도 그녀는 영친왕과 함께 지낼 수 있었고 그 덕에 경제적으로 힘든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덕혜옹주는 평생을 소극적으로 살아간 옹주였고 일본에게 계속 휘둘리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비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았지만 황실의 일원인 마지막 옹주였다. 때문에, 일본에 가서도 그녀는 영친왕과 함께 지낼 수 있었고 그 덕에 경제적으로 힘든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의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덕혜옹주는 박정희 정권인 1962년이 되어서야 겨우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4세에 떠난 그녀가 51세에 돌아왔으니 37년 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와 뒤돌아 앉은 덕혜옹주의 뒷모습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덕혜옹주가 돌아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녀가 바라던 진정한 조국이 아님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945년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귀국을 희망했으나 귀국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를 계속 괴롭혔던 한택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친일파였던 그는 미군에 의해서 기용되어 또다시 대한민국을 미 군정이 원하는 대로 점령하는 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현실이었다. 조선총독부에 걸려있던 일장기가 내려온 자리에는 미국의 성조기가 다시 올라갔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포고령을 내렸고 조선 스스로 세웠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이 남기고 떠나간 적산들은 민중들에게 무상분배되었다가 미 군정의 관리하에 다시 넘어갔다.

일본을 등에 업고 조선인들을 괴롭혔던 조선인들인 친일파들은 처단되지 않고 미군들에 의해 다시금 권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렇게 미군에 의해 점령된 조선은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지금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는 덕혜옹주가 귀국한 1962년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전히 남과 북으로 대립하며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고 친일파의 역사가 청산되지 못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일본에 죄악에 대해 사과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덕혜옹주보다 치욕적인 삶을 살았을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은 아직도 정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했고 정부는 오히려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동의도 없이 화해, 치유 재단을 설립하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지지 않은 하나의 국가, 주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 조선인의 기개를 잃지 않으려는 민중들의 국가는 아직 되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덕혜옹주의 뒷모습에서 행복보다는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돌아온 조국은 완전하지 못한 조국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덕혜옹주 일본 일제강점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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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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