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 포스터.

영화 <덕혜옹주> 포스터. ⓒ 호필름


덕혜옹주, 이덕혜를 불행에 빠뜨린 건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의 조종을 받은 일본 왕실 외에도 두 나라 왕실이 더 있었다. 덕혜를 비극으로 빠뜨릴 당시, 두 왕실은 모두 전(前) 왕실이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각각 자기 나라를 지배했다. 그 두 왕실도 덕혜의 비극에 한몫했다. 따라서 도합 세 개 왕실이 덕혜의 비애를 만들었던 것이다.

지난주 개봉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일본발(發) 비극만 강조했다. 물론 일본이 악당 짓을 가장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단독 범행은 결코 아니었다. 영화에서 다룬 덕혜의 비애는 주로 정치적·민족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그 비애 속에는 여성의 비애, 이혼여성의 비애도 있었다. 이런 비애는 바로 그 두 왕실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일본이 주범이라면 두 왕실은 종범(하위 공범)이었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멸망 2년 뒤인 1912년, 덕수궁에서 출생했다. 출생 당시 아버지 고종은 예순한 살이었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 태어났는데도 옹주 즉 후궁의 딸이란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1910년 이후에도 조선 왕실이 여전히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의 이른바 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 고종은 이완용을 앞세워 '한국 황족의 지위만큼은 보장해줄 것'을 일본 측에 요구했다. 그 결과가 이 조약의 제3조 및 제4조였다. 두 조항의 핵심 부분은 "(한국 황족이) 각각의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한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은 이씨 왕실 즉 이왕실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전체 조문은 여덟 개다. 그중에서 '앞으로 한국인들에게 잘해주겠다'는 선언적, 추상적 내용이 담긴 제5조~제7조와 부칙의 성격을 지닌 제8조를 빼면, 조약의 알맹이는 4개 조항밖에 안 된다. 4개 조항 중에서 2개 조항이 한국 황실의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바로 그 두 조항 덕분에 이덕혜는 식민지 일반백성이 아니라 옹주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의 먹잇감된 조선의 옹주

 소녀 시절의 덕혜.

소녀 시절의 덕혜.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덕수궁 돌담 바깥세상은 식민통치로 삶의 질이 현저히 나빠졌지만, 그 속의 덕혜는 아버지의 극진한 보호 속에 행복한 삶을 살았다. 고종이 얼마나 끔찍이 위했는가는, 어린 딸을 위한 특별 유치원을 덕수궁 즉조당에 만든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속에서 덕혜는 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아마도 유치원에서 만난 선생님이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고종이 덕혜를 끔찍이 챙긴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서, 덕혜는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유명해지게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국민옹주'였다.

1910년 이후로 이씨 왕실의 상왕(태왕)이란 의미에서 '이태왕(李太王)'이라 불린 고종은 힘없는 군주였다. 하지만, 덕혜한테만큼은 든든한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1919년, 세상을 떠났다. 덕혜 나이 여덟 살 때였다. 덕혜의 인생에서 울타리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초원에 버려진 어린양은 야생 짐승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일본은 유학을 시켜준다는 명분으로 1925년, 그를 끌고 갔다. 고종 사망 직후에 3·1운동으로 혼쭐이 난 일본은 조선인들이 왕족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덕혜를 조선인들과 분리시켰던 것이다. 이때 덕혜는 열네 살이었다.

고종의 며느리이자 영친왕의 아내, 덕혜의 올케인 이방자의 저서 <지나온 세월>에 따르면 이 시점부터 덕혜는 우울한 소녀로 바뀌어 갔다. 일본에서 덕혜를 만난 이방자는 "처음 보았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한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덕혜의 우울증은 귀족학교인 여자학습원에 다니는 동안에 점점 더 커져갔다. <덕혜옹주>의 속의 덕혜(손예진 분)는 당찬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제의 덕혜는 그렇지 않았다. 세라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그는 항상 우울하고 쓸쓸해 보이기만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말을 걸어도 그저 "하이, 하이"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영화 속 덕혜는 식민통치에 대해서도 꽤 용감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인 소마 유키카의 증언에 따르면 이야기가 다르다. 회고록 <마음에 놓은 다리>에 따르면, 한번은 소마 유키카가 일부러 덕혜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던졌다.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할 텐데, 너는 왜 안 하니?" 덕혜는 반응이 없었다. 대꾸할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우울한 나날의 연속 속에 덕혜는 연이어 상처를 받았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은 데 이어 일본 생활 중인 1926년, 열다섯 살 나이로 이복오빠 순종을 잃었다. 3년 뒤에는 열여덟 나이로 어머니 양귀인(귀인 양씨)마저 잃고 말았다.

일본은 어머니를 잃은 불쌍한 소녀에게 상복 착용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덕혜는 일본 왕족으로 인정됐지만 양씨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덕혜는 양씨의 상주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래서 이덕혜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순간에도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고 일본의 간섭을 의식해야 했다. 가슴에 한이 쌓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략 결혼의 희생양이 된 덕혜

 대마도에서 찍은, 덕혜옹주와 종무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 대마도 입장에서는 이 결혼이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대마도에서 찍은, 덕혜옹주와 종무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 대마도 입장에서는 이 결혼이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 김종성


고향 잃고 부모 잃은 덕혜에게 일본은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전전(前前) 대마도주의 손자이자 전 대마도주의 조카인 종무지(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강요한 것이다. 양귀인이 떠난 지 2년 뒤인 1931년의 일이다. 이 결혼과 함께 이덕혜는 종덕혜로 바뀌었다.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도록 한 일본 법률 때문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대마도 지배자를 각각 대마도주 및 대마번주로 격하해서 불렀다. 조선은 그를 대마도주로 책봉하고, 일본은 대마번주로 책봉했다. 하지만, 대마도는 오랫동안 정치적 자율성을 누렸다. 대마도 지배자는 대마도 안에서 왕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 양측을 상대로 신하 노릇을 해온 대마도는 1869년에 일본에 편입되기로 했다. 조선이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에서 1868년에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자 일본 쪽에만 줄을 서기로 했던 것이다. 순순히 편입되어준 데 대한 답례로 일본은 대마도 왕실을 백작 가문으로 책봉했다. 그렇게 백작 가문으로 전락한 대마도 왕실의 계승자가 바로 종무지였다.

조선의 왕녀(공주+옹주)가 과거의 신하였던 대마도 왕실에 시집가는 것은 조선 왕실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이 조선과 대마도 양쪽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고, 덕혜는 이런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이 결혼도 정신적 충격이 됐는지, 결혼 얼마 뒤부터 덕혜는 정신분열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종무지가 지은 시에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란 대목이 나온다. 덕혜는 그렇게 병들어 갔다. 그런 중에 딸 정혜가 태어났다. 1932년, 덕혜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이 결혼생활은 처음 15년간은 그런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파탄 나고 말았다. 파탄의 원인은 '쩐', 전(錢)이었다. 일본 패망 전만 해도 두 사람은 귀족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 돈을 받았다. 종무지는 그 돈으로 가사 도우미들을 고용해 덕혜를 보살피도록 했다. 덕분에 종무지는 병든 아내의 수발을 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자기 일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을 지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 부부는 평민으로 전락하고 재산 대부분마저 강제 헌납을 당했다. 이렇게 되자 가사도우미를 구할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덕혜를 직접 보살펴야 할 상황이 되자 종무지는 종덕혜를 과감하게 내버렸다. 정신병원에 보내버린 것이다.

이때가 46년, 덕혜 나이 서른다섯 때였다. 영화 속의 종무지는 자신이 종덕혜를 버린 게 아니라 종덕혜가 자신을 떠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종무지가 종덕혜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일본 왕실에 이어 전(前) 대마도 왕실마저 덕혜를 불행으로 내몬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두 왕실' 중 하나는 바로 전 대마도 왕실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1951년, 덕혜는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보호자도 없이 일본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가 일본 국적마저 상실했으니, 한층 더 무방비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종무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55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는 의식 없는 종덕혜를 상대로 이혼절차를 진행했다. 덕혜 본인이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친왕이 이혼에 동의해주었다. 이혼 뒤 종무지는 새 장가를 들었다.

덕혜를 불행으로 내몬 '두 왕실'에는 전(前) 조선 왕실 즉 이왕실도 있었다. 고종을 태왕(상왕)으로 하고 순종을 이왕으로 하는 상태에서 1910년 출범한 이왕실은 1926년 순종이 죽자 이복동생 영친왕을 제2대 이왕으로 세웠다. 이왕실은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

조선 왕실도 덕혜를 버렸다

 영친왕.

영친왕.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이왕실은 덕혜의 비극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혼당한 덕혜가 가문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종씨 가문에서 종덕혜로 살았던 덕혜는 이혼과 함께 종씨 성을 잃었다. 이렇게 되면 원래 성을 따라 이덕혜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이덕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양덕혜로 돌아왔다.

정신병원에 갇혀 자신이 이혼당한 줄도 모르는 덕혜가 스스로 양씨 성을 썼을 리는 없다. 당시 덕혜의 신상을 주관한 사람은 가문의 책임자인 영친왕이었다. 그가 덕혜에게 이씨 대신 양씨 성을 주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혼당한 여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일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머니 성을 따라 양덕혜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전(前) 조선 왕실마저 덕혜를 내버리는 데 동참했던 것이다.

덕혜가 이 나라, 저 나라 왕실에 차이다가 결국 자기 나라 왕실에까지 차이는 겹겹 아니 '겹겹겹'의 비극을 겪는 중에, 이런 덕혜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덕혜의 딸, 정혜였다. 어머니가 이혼당하고 가문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된 이듬해인 1956년, 딸 정혜는 유서를 남긴 채 눈 덮인 설산에 올라 스스로 그 속에 갇혀 버렸다. 불쌍한 어머니를 두고 더는 살 수 없어,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아버지·오빠·어머니에 이어 딸까지 세상을 떠난 줄도 모르고 정신병원에서 멍하니 지내던 양덕혜는 1962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전주 이씨 왕실에 대한 경쟁심 때문에 이씨 왕족의 귀국을 불허했던 전주 이씨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덕분에 생긴 일이다.

영화 속의 덕혜는 귀국 당시 조금이나마 의식이 있어 옛 시녀를 알아보는 듯했지만, 실제의 덕혜는 그럴 여유도 없었다. 승용차를 타고 서울에 진입한 뒤 자기 집인 덕수궁 앞을 지나는데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무의식 상태에서 귀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귀국과 함께 서울대 병원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중에 덕혜가 종종 정신없이 읊조린 말은 '정혜야! 정혜야!', '아리랑~아리랑' 같은 몇 마디뿐이었다. 그는 서울대 병원에서 나온 뒤로 창덕궁 내 낙선재 구역에 있는 수강재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초반 격동기에 하필이면 몰락한 왕실의 왕녀로 태어나 비운의 삶에 빠진 덕혜는, 고향 잃고 부모 잃은 데 이어 정신병마저 얻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상태로 일본·대마도·조선 삼국 왕실에 이리저리 차이며 살다가 향년 78세를 일기로 한(恨) 많은 세상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감았다.

 창덕궁 낙선재 구역.

창덕궁 낙선재 구역. ⓒ 김종성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13년 1월 22일 필자가 쓴 '환갑에 얻은 귀한 딸, 인질로 잡혀갈 줄이야'를 영화 <덕혜옹주> 내용에 맞게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덕혜옹주 종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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