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렐>은 백인 남성 사회에서 여성이자 레즈비언으로 살았던 로렐 헤스터(줄리안 무어 분)와 스테이시(엘렌 페이지 분)의 사랑과 '당연한 평등'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로렐은 자신의 연금 수령인을 배우자인 스테이시로 인정해 줄 것을 주정부위원회에 요청한다. 그러나 주정부위원회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았다며 거절한다.

영화는 로렐과 스테이시가 겪는 차별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과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 두 사람의 삶과 사랑에 압도당해 당연한 평등이 거절당하는 현실에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로렐과 스테이시의 삶을 훈계하는 백인 남성들

영화 <로렐> 스틸컷 로렐의 연금 양도 신청을 거절한 주정부위원들 앞에서 발언하는 스테이시

▲ 영화 <로렐> 스틸컷 로렐의 연금 양도 신청을 거절한 주정부위원들 앞에서 발언하는 스테이시 ⓒ 엣나인


로렐은 23년 차 베테랑 형사다. 로렐이 근무하는 경찰서에 여성 경찰은 그녀 하나뿐이다. 영화는 로렐이 범인 검거를 위해 잠복근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로렐은 근무하는 와중에도 동료 남성 경찰로부터 성희롱적인 발언을 듣는다. 로렐은 '이런 일쯤이야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넘어가야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상황을 감내한다.

로렐은 이렇게 남성성 짙은 근무 환경임에도 여러 표창장까지 받으며 동료 남성 경찰들보다 유능하게 사건을 처리해 나간다. 그녀는 이런 성과를 이뤄내기까지 많은 차별과 희롱을 감내해야 했다.

로렐의 꿈은 뉴저지주 최초 여성 부서장. 이런 그녀에게 '레즈비언'이라는 성적 지향은 숨기고 싶은 사실이다. 평생을 몸 담아온 경찰서에서 부서장이라는 꿈이 좌초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여자라 승진이 힘든데 레즈비언이면 말 다했지"라는 그녀의 대사는 잔존해있는 성차별과 성적지향 차별 모두를 포괄해 보여준다.

로렐의 연인인 스테이시 역시 남성성이 짙은 직장에서 근무한다. 그녀의 직업은 자동차 정비사. 스테이시는 취직하기 위해 새로운 자동차 정비소에서 면접을 본다. 그런데 정비소 사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한다. 스테이시가 자신감을 내비치자 사장은 남성 직원 한 명과 '타이어 빠르게 갈기' 경쟁을 시킨다. 결과는 스테이시의 완승. 사장은 바로 스테이시를 채용한다.

로렐과 스테이시 모두 '남성의 세계'라고 인식되는 곳에서 일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남성들보다 더 유능하다. 그녀들의 삶에서 '여성'이라는 성별과 '레즈비언'이라는 성적 지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선입견을 가지고 훈계를 한 건 백인 남성들이었다. 또한 '동성 결혼'이 합법화 돼 있지 않다며 차별을 보여준 것도 백인 남성들이었다.

로렐은 그녀의 직장 동료이자 콤비처럼 일하던 파트너, 데인(마이클 섀넌 분)에게 가장 먼저 커밍아웃을 한다. 그러면서 로렐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백인 남자에 게이도 아니라서 몰라."

백인에, 남성에, 이성애자. 인종, 성별, 성적 지향에서 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실존하는 차별이 '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실현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로렐과 스테이시는 '주변인'이라는 백인 남성의 산을 넘고 더 큰 산을 만난다. 다섯 명의 백인 공화당 남성으로 이뤄진 '주정부위원회(Freeholders)'다. 사회가 용인하는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만 살아온 그들은 아주 쉽게 로렐의 연금 양도 신청을 거부한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거부한다. 거부를 선택하는 과정 중에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이것을 거부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듣게 될 비난을 먼저 고려하기만 할 뿐이다. 데인이 위원들의 연금 이중 수혜 문제를 찾아내 고발하려 하자 위기에 직면한 주정부위원회는 그제야 로렐의 연금 양도 신청건을 두고 토론을 벌인다.

우리는 '평등'과 '합법'을 너무 편하게 말한다. "나는 여성을 차별한 적이 없어"라고 쉽게 단언하지만, 현실은 여성이 승진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롱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일해야 한다. 또한, '나 자체'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남성보다 잘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만 채용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법대로 했어"라고 쉽게 설명하지만, 현실은 그 법이 가진 모순 때문에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다. 여성이라는 성별과 레즈비언이라는 성적 지향을 가지고 백인 남성 사회에서의 산다는 것은 이토록 '불평등한 평등'과 '불법적인 합법'을 견디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로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두려움에 떨고 뭔가 숨기며 사는 건 정말 끔찍한 삶이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 <로렐> 스틸컷 주정부위원회에 출석해 발언하는 로렐.

▲ 영화 <로렐> 스틸컷 주정부위원회에 출석해 발언하는 로렐. ⓒ 엣나인


로렐이 연금 양도 신청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성소수자인권단체에서 그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다가온다. 그들은 거듭해서 '동성 결혼 합법화'를 외친다. 그러나 로렐은 그들에게 잘라 말한다.

"난 동성결혼 관심 없어요. 평등을 원할 뿐이지."
"사랑하는 여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할 거야."

영화는 로렐과 스테이시의 사랑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당연한 '평등'을 계속 환기한다. 로렐이 스테이시와 가족이 됐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연금을 자신이 사랑하는 파트너인 스테이시가 받도록 하는 것이 왜 부당한 일이냐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사랑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해야 했다면 로렐과 스테이시는 그 '사랑'의 정도를 설명하고 증명해내야만 한다. 그런데 그녀들에게 그런 설명과 증명은 불필요하다.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 존엄을 위한 당연한 권리 행사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나를 죽이려는 살인마 앞에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인간이고, 인간은 존엄하므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렐과 스테이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족이 됐고 가족으로서 정당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에 그 권리 실현을 요구했을 뿐이다. 이 앞에서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애틋한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당연하고 평등한 권리 실현을 가리는 일이다. 영화는 이를 아주 잘 파악해 보여주고 있다. 관객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이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특별하지 않았다

영화 <로렐> 스틸컷 로렐이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 해변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로렐과 스테이시

▲ 영화 <로렐> 스틸컷 로렐이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 해변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로렐과 스테이시 ⓒ 엣나인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라 그런지, 그들의 사랑도 위대하고 숭고한 것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로렐과 스테이시는 '영화같이'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이른바 '썸' 타는 기간도 거치고, 연인이 된 후에 서로 간 보는 시간도 거쳤으며, 사소한 걸로 싸우고 행복해하는, 그저 평범한 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정부위원회와 싸우는 중에도 그들이 얼마나 힘겨운지 강조하지 않았으며, 관객을 울리기 위해 감정을 폭발시키지도 않았다. 눈물을 자아내기 위한 의도적인 클로즈업이나 구슬픈 BGM 없이 슬픔을 절제해 연출했다.

그저 보여주었다. 여성으로서의 삶과 레즈비언으로서의 삶,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울지 않았지만 관객은 울었다. 영화가 담담하면 담담할수록 관객은 울었다. 편안한 연출, 그 안에 담긴 두 사람의 인생을 관조하며 '당연한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고, 그네들의 인생에 절제된 슬픔을 능동적으로 꺼내 느꼈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롱기누스는 '숭고란 듣는 이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시키는 것'이라 봤다. 위대한 글이나 말은 상대방을 설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모든 이를 압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로렐>은 로렐과 스테이시의 삶과 사랑을 특별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숭고한 것으로 억지 포장해 전시하지 않았다. 성차별주의자들과 성소수자혐오자들을 설득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와 잔잔하지만 오랜 파동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현실과 그 현실을 사는 이들의 현존하는 고통, 그리고 이렇게 고통받는 이가 우리 주위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충격에 압도당했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는 관객에게 이런 자발적 성찰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영화 <로렐> 포스터 영화 <로렐>은 교훈을 억지로 설파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스레 보여준다.

▲ 영화 <로렐> 포스터 영화 <로렐>은 교훈을 억지로 설파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스레 보여준다. ⓒ 엣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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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산책을 좋아합니다. 준이, 그리, 도비와 삽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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