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를 찾아서 포스터

▲ 도리를 찾아서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볕 좋은 너른 바위에 바다사자 플루크와 루터가 올라 있다. 하루 종일 따끈한 바위에 널브러져 낮잠을 자다 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 바위 곁엔 어눌한 바다사자 제럴드가 맴돌며 호시탐탐 바위에 오를 기회만 엿본다. 하지만 바위에 오를라치면 플루크와 루터가 호되게 짖어대는 통에 기가 꺾여 돌아서기 일쑤다. 영화는 이 과정을 수차례에 걸쳐 흥겹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플루크와 루터의 호감형 외모와 제럴드의 우스꽝스러운 외모도 한껏 대비된다.

어린이들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할리우드서 일가를 이룬 디즈니 스튜디오. 자기 사는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디즈니 캐릭터 이름은 모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려왔다. 맏형인 미키 마우스부터 아기곰 푸와 로봇 버즈, 얼음공주 엘사 등 캐릭터 수익으로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 된 디즈니는 어느덧 창립 85주년을 앞두고 있다. 사람으로 치면 완연한 노년의 나이지만 디즈니 왕국은 여전히 청춘이다.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때 2D 애니메이션에 대한 집착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니냐는 비판도 수도 없이 받아왔다. 디즈니가 내놓은 해법은 인수였다.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픽사 스튜디오와 결합, 반전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내놓은 영화가 <업>, <월-E>, <겨울왕국>이니 선택은 분명한 성공이었다.

편견으로 가득찬 디즈니 왕국

 어린이들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할리우드서 일가를 이룬 디즈니 스튜디오. 자기 사는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디즈니 캐릭터 이름은 모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려왔다.

어린이들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할리우드서 일가를 이룬 디즈니 스튜디오. 자기 사는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디즈니 캐릭터 이름은 모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려왔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여러모로 품격 있는 작품을 만들어 온 제작사지만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지난 세월 수없이 제기돼 온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가 대표적이다. 초기엔 청교도적이었고 나중엔 백인 중심이며 남성 중심적이었던 디즈니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그 모습을 달리하긴 했으나 여전히 한국 대법관 구성 만큼이나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가족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외모를 중시하는 등 너무도 쉽게 주류사회가 공유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여성과 비주류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합리화하는 태도다. 디즈니 영화는 대개 여성에 한정적인 이미지를 입히곤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은 귀한 신분의 여성으로 긴 머리에 큰 눈, 하늘하늘한 몸매가 특징적이다. 바비인형이 그렇듯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 캐릭터 역시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린아이들에 하나의 미적 기준을 세우고 강화해 왔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 비천한 신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주가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매력적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은 필수적이라 할 만했다. 아주 오랫동안 디즈니 영화 속 여성이란 아름다운 공주거나 영웅의 트로피로 존재해왔다.

<도리를 찾아서>에서도 반복된 디즈니의 편견

도리를 찾아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열대어 블루탱 도리. 메멘토 이외에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는 성공한 적 없다.

▲ 도리를 찾아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열대어 블루탱 도리. 메멘토 이외에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는 성공한 적 없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물론 디즈니의 편견도 변화를 겪었다. 근래 나왔던 <겨울왕국>만 봐도 왕자로부터 선택받는 수동적 여성상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디즈니의 여성상이 이미 주체적이 된 시대적 여성상보다 더 앞서나갔다고 보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남녀의 사랑 대신 형제의 우애를 통해 역경을 극복한다는 결말도 오래된 가족주의의 소산에 불과하다. 더욱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갖은 고초를 이겨낸 끝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줄거리 역시 기존의 영웅 서사로부터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설정이고 말이다.

디즈니의 편견은 신작 <도리를 찾아서>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된다. <도리를 찾아서>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니모를 찾아서>의 스핀오프 격 작품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 도리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부모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다. 동물에게 인간성을 투영해 가족의 소중함이나 우정 등을 강조하는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의식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2003년 개봉한 본편 <니모를 찾아서>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온 세상 바다를 헤집고 다니는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아들의 이야기였다. 아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무시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깊이 반성한다. 한쪽 지느러미가 약하다는 핑계로 늘 기가 죽어있던 니모는 목숨을 건 여정 끝에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자세를 배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친다. 이것이 <니모를 찾아서>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였다.

이번에 개봉한 <도리를 찾아서>는 단기 기억상실증이란 역경을 딛고 부모를 찾아 나선 도리의 모험적 드라마다. 역경을 딛고 노력한 끝에 목표를 달성한다는 점에서 본편에서 그려진 니모의 드라마와도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니모와 니모의 아버지는 사라진 도리를 추적하며 본편에서 달성된 드라마를 한 층 강화한다.

왕따에 민폐, 외모지상주의까지... 아이들 보는 영화가 이래도 되는 걸까?

도리를 찾아서 니모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바다사자 플루크와 루터. 영화는 이들이 덜떨어진 외모의 바다사자 제럴드를 따돌리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 도리를 찾아서 니모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바다사자 플루크와 루터. 영화는 이들이 덜떨어진 외모의 바다사자 제럴드를 따돌리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영화는 도리의 성장보다는 주변의 호의에 기대 이야기를 풀어간다. 바다거북과 문어, 바다 갈매기, 혹 돌고래, 철갑상어, 수달 등이 돌아가며 도리와 니모 부자에 도움을 주는데 백번 양보해 이들이 베푸는 조건 없는 호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문어나 혹 돌고래와 같이 특수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움을 주는 건 마치 전지적 존재의 개입과도 같이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치열한 고민으로 내적 성장을 위기의 극복과 연결지었던 본편과 달리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약점을 딛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주인공의 드라마 가운데 편견과 고정관념이 자연스레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 언급한 바다사자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쿠키 영상으로도 삽입됐을 만큼 힘주어 연출된 바다사자 에피소드는 두 마리 멀쩡한 바다사자가 니모 부자에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제럴드라는 어눌하고 우스꽝스러운 외모의 바다사자를 따돌리는 모습을 '유쾌하게'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니모 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새 베키를 부담스러운 외모로 묘사하는 등 영화는 외모에 따라 특정 생명체를 웃음거리로 삼는 선택을 꺼리지 않고 있다. 수달이 귀여운 외모로 달리는 차를 세우는 모습과 비교된다. 이와 같이 캐릭터의 외모를 강조하고 기준에 미달한 경우 웃음거리로 만드는 설정은 보는 이에게 부적절한 편견을 주입하고 강화하기 충분하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관객층이 어린아이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애니메이션이기에 주인공 중심적이고 외모지상적인 관점이 용서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떠한 생각도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이처럼 폭력과 차별에 둔감한 영화를 보여주는 건 부적절하다고. 그리고 외모로 다른 생명체를 따돌리는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이 과연 적절한지를 되물어야 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여러모로 <도리를 찾아서>는 아이와 어른이 모두 만족할 수 있었던 본편의 미덕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하다. 영화관을 나오며 씁쓸한 웃음을 지은 게 오직 나만은 아닐 것이다.

도리를 찾아서 도리에게 결정적 도움을 제공하는 데스티니와 베일리. 특히 혹돌고래 베일리의 도움은 가장 큰 역경을 극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 도리를 찾아서 도리에게 결정적 도움을 제공하는 데스티니와 베일리. 특히 혹돌고래 베일리의 도움은 가장 큰 역경을 극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도리를 찾아서 디즈니 김성호의 씨네만세 니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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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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