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적인 취향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힙합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힙합 비트에 맞춰 춤추기를 좋아했고 여전히 힙합 관련 프로그램은 '닥본사' 하는 편이라 언더그라운드까지는 잘 몰라도 미디어에 나오는 래퍼들은 웬만큼 알고 있다.

<쇼미더머니>(아래 <쇼미>) 시즌1(2012)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래퍼 치타가 <언프리티랩스타>(2015) 첫 시즌에서 우승을 거둔 역사를 알고 있기에 여성으로서 랩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은 할 수 있다. 남성 래퍼들을 '압살'할 정도가 아니면 '계집애가 무슨 랩' 같은 소리나 들어야 하는 국힙(K-hiphop)의 토양에서, 여전히 '비치'(bitch, '암캐'라는 뜻의 영어 단어. 힙합에서 자주 쓰인다)는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래퍼들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대세' 비와이가 논란의 중심이 된 이유 

 쇼미더머니5 우승팀 인터뷰. 비와이, 사이먼도미닉, 그레이, 최효진 피디

우승자 비와이는 첫 등장부터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 Mnet


좋은 발성과 귀에 쏙쏙 박히는 가사의 전달력(딜리버리), 유니크한 톤과 자신만의 어법과 가사, 매력적인 외양과 스타성. 현재 래퍼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다. 남성 래퍼 중에도 (드물게) 훈훈한 외모로 여성 팬덤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쇼미>는 이를 '브로맨스'로 소비한다.

힙합에 특화된 YG(시즌 3에서 우승자 바비를 배출했다) 소속의 래퍼 원은 시도 때도 없이 "잘 생겼다"는 상찬과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외모 덕에 랩 실력이 가려지는 정도였는데 본인도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숨기지 못하고 연이어 실수를 했다. <쇼미> 시즌5의 프로듀서 중 가장 가부장적인 캐릭터였던 쿠시는 선호하는 래퍼들에게 연신 "사랑한다"라고 외치는가 하면, 해쉬스완에게 "다리가 예쁘다"는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이번 시즌의 브로맨스 최강자는 따로 있다. 우승자 비와이는 첫 등장부터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선전은 여러모로 신선했는데, 크리스천 래퍼답게 디스나 욕이 아닌 자신의 세계관이 담긴 진지한 가사와 유니크한 플로우(혹자는 방언을 양식화한 랩이라고 함)로 듣는 이를 숙연하게 했다.

그는 경연에서 승승장구했고 높은 공연비를 받았다. <Day Day(데이데이)>가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음원 성적도 월등해 우승에 긴장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열광한 건 (경쟁자라는 것도 잊은) 동료 래퍼와 프로듀서들이었다. 그를 팀원으로 맞은 쌈디는 비와이의 경연에 감동을 받아 눈물까지 글썽였고, 우승 직후엔 오랜 친구 씨잼의 뽀뽀 세례도 받았다.

 쇼미더머니5 우승팀 인터뷰. 비와이, 사이먼도미닉, 그레이, 최효진 피디

<쇼미> 시즌5 우승으로 유명해진 비와이. 하지만 그 역시 '여혐'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Mnet


비와이의 자신감은 랩 실력보다는 '섹시함'에서 방점을 찍은 듯하다. 쿠시가 "성대가 야할 것 같다, 목소리가 야하다"고 하자 그는 담담하게 자신이 섹시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그는 '남성들이 열광하는 래퍼'지만, '무리수'를 던진 적도 있다.

"날 보면 군대에서도 뒤로할 걸 국가안보. 여성의 동성애는 분명 나로 인해 감소. 왜냐면 내 Flow(플로우)에 흥분하거든 레즈비언도."

비와이가 지난해 내놓은 곡, <F5> 가사의 일부다. 다 알겠지만 '뒤로 한다'는 것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자신 때문에 게이 섹스가 증가하고, 레즈비언 섹스는 감소한다는 이 표현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종교를 떠나 성소수자 중에서도 특히 여성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우습게 여기고 비하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표현이다. <쇼미> 시즌5의 결승 무대를 앞두고 있던 때, 이 가사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여성을 비하하지 않고서도 승승장구하던 그가 '여혐 래퍼'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간 <쇼미>는 여성 비하나 선정적인 표현을 거르지 않고 방송해 여러 번 문제가 되었다. 그 방점을 찍은 시즌4에서 송민호는 문제가 커지자 정식으로 사과했지만 '산부인과 운운'한 가사로 물의를 빚었다. 그와 겨뤘던 블랙넛은 여혐 래퍼의 대표나 다름없다. 일관되게 '힙찔이' 정체성을 토로한 가사는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다. 문제가 될 만한 표현을 무음·블러 처리하는 등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시즌5도 어김없이 논란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주로) 여성팬에게 인기를 얻는 아이돌이나, 여성에게 외면받은 경험을 거칠게 표출하는 언더 래퍼의 화살이 공통적으로 향하는 방향이 '여성'이라는 점은 남자들의 문화에서 약한 이를 짓밟는 것을 얼마나 문제의식 없이 소비해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잣대를 공유하던 남성 래퍼들이 '빗치'를 풍자하거나 자신들에게 열광하는 '생각 없는' 여자들을 우습게 여기다가 자신과 같은 무대에서 경쟁하는 (여성팬의 인기를 빼앗는) '걸크러시' 래퍼를 대할 때, 혼란이 생겨난다. 여성이란 자신을 지지해주는 모성애적인 존재와 자신을 경멸하거나 상처 준 '나쁜 년'밖에 없었는데 위협적인 여성의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여자치고는' 잘하는 래퍼들의 비애

치타, 걸크러쉬 선두주자! 가수 치타가 15일 오후 서울 동대문 DDP에서 열린 < SIA(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Style Icon Asia) 2016 > 핑크카펫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14일과 15일 양일간 열린 < SIA 2016 >는 기존의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Style Icon Awards)'를 넘어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Style Icon Asia)'로 확대된 페스티벌로 셀럽들의 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 컨벤션 SIA LOOK, 콜라보레이션 무대인 SIA SHOW, 프라이빗 애프터 파티 SIA NIGHT, 공공캠페인 SIA MOVE 등이 펼쳐졌다.

쇼미더머니 모든 시즌을 통틀어 본선에 진출한 유일한 여성이 치타였고, 탄탄한 실력에 (아마) 전략적으로 면모한 스타일링을 통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증명함으로서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 이정민


<쇼미> 모든 시즌을 통틀어 본선에 진출한 유일한 여성이 치타였다. 치타는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전략적인 스타일링을 통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증명했다. 덕분에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긴 머리를 짧게 커트하고 강렬한 메이크업과 자신감 있는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타인을 깎아내리지 않는 태도로 '새로운 모델'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쇼미>의 여성 버전인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인지도를 얻는 대신 악플과 성적 대상화를 감수해야 한다. 가사를 잊거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여자라서' 하는 꼬리표가 달린다. 카메라는 경연 과정에서 울고불고 서로를 쥐어뜯는 것처럼 묘사하고, 여성 래퍼들 사이의 팀워크나 끈끈함을 삭제하곤 한다. '국힙'의 디폴트가 남성형이고, 여성은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뭉뚱그려진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다. 잘하는 여성에게는 '여자치곤' 잘한다는 칭찬 아닌 칭찬이 주어진다.

물론 남성래퍼 중에도 다른 가사를 쓰고, 다른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이 있다. 페미니스트 가수 안혜경을 이모로 둔 매드클라운은, '커피카피아가씨'를 랩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동시대 여성의 삶을 그렸다. 전혀 과격하지 않은 이 노래가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맥빠지지만. 

매드클라운 ‘PIECE OF MINE' 커버 3집 미니앨범에 담긴 트랙 '커피카피 아가씨'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 매드클라운 ‘PIECE OF MINE' 커버 3집 미니앨범에 담긴 트랙 '커피카피 아가씨'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 Starship X


"대학교를 졸업 후 취업서류 면접 광탈. 외모도 스펙이란 걸 깨닫고 난 후 움직였지 당장. 시원히 깎아버렸지 옛 얼굴 갖다 버렸지. 엄만 울고 커피도 울었지 왜 울음이 나왔는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 참 빡세다는 생각. 암만 생각해도 양악은 개깡이었지 내가 봐도 참 대단. Hey 잠깐, 누가 김커피를 향해 손가락질합니까, 2015 대한민국 그녀는 일이 필요한 것뿐이었는데." - 매드클라운, '커피카피아가씨' 중에서

힙합계든 직장이든 같은 선상에서 경쟁하기 위해 여성이 더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은 지운 채, '여자라서 대접받는다'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은 아무리 랩을 잘해도 훌륭한 래퍼라고 할 수 없다. 닥터드레와 스눕독도 과거의 여성비하 표현에 사과하는 시대다.

'미생'의 삶은 돈벌이가 힘든 힙합을 택한 이 시대의 래퍼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미래와 다름없다. 일관되게 성공을 노래하는 래퍼 도끼처럼 되는 것이 모두의 희망일지 몰라도 적어도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누구도 깎아내리지 않고 이룬 성취야말로 값지고, 응원받을 만한 것이 아닐까.

K-힙합 쇼미더머니 여성비하 언프리티랩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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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하셨습니까>를 썼고 인권, 여성 분야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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