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한 장면.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 할리퀸의 대사 번역 문제로 SNS 상에서 논란이 일었다.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한 장면.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 할리퀸의 대사 번역 문제로 SNS 상에서 논란이 일었다. ⓒ 워더브러더스코리아(주)


12일 오후, 트위터 코리아 실시간 트렌드에 '#박지훈보이콧'이란 낯선 해시태그가 출현했다. 감독도, 배우도, 평론가도 아닌, 영화 번역가에 대한 보이콧이 SNS상에서 화제가 되는 일은 극히 드문 것이 사실이다. 이날 오후 내내, 한 번역가에 대한 비판이 트위터상에서 홍수를 이뤘다. 한 트위터 사용자의 항의는 이런 내용이다.

"배우들하고 제작진들이 팬들을 위해서 정말 원작 파괴 안 하려고 열심히 찍었는데 번역에서 캐릭터붕괴가 나면 어떡합니까? 수많은 제작진의 노력이 한 사람으로 인해 붕괴하는 걸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ja*********)

발단은 8월 개봉 예정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예고편 자막에서 비롯됐다. DC 코믹스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 속 리더 격인 여성 캐릭터 할리퀸(마고 로비 분)의 대사 번역이 문제였던 것.

요약하자면, DC 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퇴폐적이며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이자 팀의 리더 격인 캐릭터의 성격이 번역으로 인해 오염(?)되거나 훼손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 듯,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이 할리퀸이 남성들에게 존대말을 쓰고, 심지어 "오빠"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급기야 영화 개봉 전 '번역가 보이콧'이란 거센 반발이 일고 있는 것이다. 비극은 이런 반발과 비판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속되는 외화번역 논란, 왜?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한 장면. 번역 논란은 <배트맨 대 슈퍼맨>도 피할 수 없었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한 장면. 번역 논란은 <배트맨 대 슈퍼맨>도 피할 수 없었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박지훈 번역가가 또? '배트맨 대 슈퍼맨'의 해명"

지난 3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개봉 당시 유원정 <노컷뉴스> 기자가 쓴 3월 23일 자 기사 제목(☞바로가기)이다. 같은 번역가가 번역을 맡은 이 작품은 눈에 띄는 오역들로 인해 영화 커뮤니티와 SNS 상을 통해 논란이 된 바 있다. 배급사 측도 부랴부랴 "예고편은 번역가가 아닌 자체 제작한 자막"이라며 해명에 나섰고, 본편 번역의 일부 오류를 인정하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 전후해 적지 않은 영화 팬들이 이른바 '발 번역'을 걸러 내겠다는 선의(?)를 감추지 않으며 외화 번역 자막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분위기다. 특히 코믹스가 원작인 블록버스터의 경우, 기존 원작의 두터운 팬들이 존재하기에 관객들의 자발적인 지적과 정화가 훨씬 더 빠르고 정교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는 이러한 불신이 해프닝으로 번진 케이스다. 지난 4월 개봉 당시, 극 중 앤트맨의 "Does anyone have any orange slices?"란 대사가 논란이 됐다. '오렌지 라이센스'를 '슬라이스'로 오역한 게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일파만파 퍼진 것이다. 이후 '미국에서 흔히 운동 후 먹는 과일'로 정리가 됐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도 캐릭터들의 이름이나 남녀의 존댓말 사용, 주요 맥락을 놓친 번역이 불편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번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경우, 캐릭터 자체의 성격과 함께 여성 캐릭터에 대한 편향된 시각이 드리워진 것은 아니냐는 우려도 동시에 받고 있다. 할리퀸의 성격이나 대사의 맥락과는 전혀 다르게 존댓말을 쓰는 번역이 영화나 캐릭터 전체의 방향과 의도까지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박지훈 번역가의 경우, 과거 <007 스카이폴>에서 맥락을 오도할 수 있는 '된장녀'라는 단어 사용으로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박지훈 보이콧', 이제 시작이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포스터. 당시 초월 번역으로 영화 팬들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포스터. 당시 초월 번역으로 영화 팬들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 컬럼비아픽쳐스


"대략 난감이네요", "겁나 피곤해요", "가슴은 므흣하던가", "짱나", "완소 훈남", "대략 난감이네요.", "코디가 안티인가 봐".

이상은 지난 2007년 영화계에서 논란이 됐던 외화 <마리 앙투아네트> 속에 등장한 자막 일부다. 당시 유행하던 유행어와 조어 등을 과감히 가져다 쓴 이 자막은 영화 감상에 방해를 주고 불쾌감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왔다.

영화 자체가 아무리 퓨전시대극이라고 하지만, 개봉 이후 비판이 쏟아져다. "초벌 번역이 그대로 프린트화 됐다"는 수입배급사 측의 해명이 나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불쾌한 의역과 오역이 공론화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블록버스터를 중심으로 과도한 유행어 사용이나 축약, 과도한 의·오역에 대한 지적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영화계 안팎에서는 이미 이러한 논란의 원인으로 '글자 수 축약을 기본으로 창작에 가까운 영화번역 작업 자체의 어려움', '일부 번역자들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수입사·직배사의 내부 환경', '부족한 작업 시간' 등이 거론됐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후 9년, 코믹스 원작의 블록버스터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이러한 지적들이 다시금 거세지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SF나 게임, 코믹스, 밀리터리 관련 영화들의 경우 마니아 팬층이 두터워 지면서 번역 수준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맥락과 동떨어진 여성의 존대와 같이 성차별 이슈 역시 세심한 번역을 해야 하는 대목이다. 불법 다운로드 영상에 기반을 둔다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10년에서 15년 가까이 일반인 자막 제작자들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굳이 영어 교육 수준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마니아뿐만 아니라 영화번역과 자막에 대한 일반 관객들의 눈높이가 한없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요인은 한둘이 아니다. '발 번역'은 물론이요, 무성의한 외화번역은 지속해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환경인 셈이다.

비단 '박지훈 보이콧' 움직임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일 수 있다. 수입·배급사들과 일부 번역가들이 관객들의 요구에 세심함과 환경적 뒷받침으로 부응하지 않는다면, 흥행에 독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관객들의 보이콧 움직임은 계속될지 모른다.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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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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