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장은 남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소설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고정관념'이 삶 속에 스며들어 자연스러워지는 순간 성차별은 내면에 뿌리내리게 된다. 어느새 남자는 반장이나 사장이 되는 일이 당연해지고, 여자는 주부나 교사, 간호사와 같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비중이 높은 직업군에 그 역할이 제한된다.

만일 이러한 고정관념이 어렸을 때 접했던 만화를 통해 형성되고 있다면 어떨까?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차별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차별 ⓒ EBS, 퍼니플러스, 올리브, 로이비주얼


김아무개(34)씨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퍼니플럭스가 제작한 국산 애니메이션 <슈퍼윙스>를 보다가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편견에 크게 놀랐다. "일단 여자 캐릭터가 잘 나오지 않고, 여자 아이랑 남자 아이가 탑에 갇힌 공주와 왕자 놀이를 하는데 성차별적인 부분이 있어 아이에게 그 애니메이션을 못 보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가 커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성차별을 그대로 답습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이후로 아이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기 전에 미리 모니터링을 거친다. 김씨는 "배운 걸 정정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옆에서 말을 해도 편견이 한 번 생기면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 같이 보면서 설명을 해주고 지도하려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주변에 있는 부모들이 하나같이 성편견을 너무 빨리 배워 걱정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다수의 여자 캐릭터들이 착하고 남자 캐릭터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역할에 머무르다보니 주변부 신세가 된다"며 국산 애니메이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또한 "디즈니에서는 <겨울왕국>의 엘사,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 등 진취적이고 주도적인 공주상을 제시하는 등 이를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에도 국내 제작 만화의 성차별적인 요소들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고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국산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차별이 정말 심각하다"라는 김씨(34)는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국산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차별이 정말 심각하다"라는 김씨(34)는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 유지영


며칠동안 김씨는 SNS를 통해 공식적으로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차별'이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인신공격에 시달렸다. 그는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그 정도로 불편해하면 다른 콘텐츠는 어떻게 보냐", "엄마가 키우는 애가 불쌍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절대적 여성 캐릭터 수의 부족이 현실 반영한 것? "씁쓸해"

인기 국산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아래 <뽀로로>)의 주인공은 뽀로로, 크롱, 포비, 에디, 루피, 패티, 해리다. 그 중 여자 캐릭터는 단 둘뿐. 사정은 다른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로보카 폴리>(아래 <폴리>)의 주인공은 폴리, 로이, 헬리, 앰버, 진 등 다섯인데 이중에 여자 캐릭터는 둘뿐이고 그마저도 자동차 캐릭터 중에서는 단 하나뿐이다. <꼬마버스 타요>(아래 <타요>)에서는 주인공 버스 캐릭터 타요, 로기, 라니, 가니 중 역시 딱 하나뿐이다. <냉장고 나라 코코몽>(아래 <코코몽>)에서는 코코몽, 로보콩, 아로미, 케로, 아글 가운데 역시 딱 하나. <슈퍼윙스>에서는 등장인물 아홉 중에서 여자 캐릭터는 단 둘뿐이다.

이들 중 애니메이션 속에서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하는 뽀로로, 폴리, 타요, 코코몽, 호기는 100퍼센트 남자 캐릭터다. 김씨는 이 점을 먼저 지적했다. "다섯 개의 시리즈 가운데 여자 캐릭터를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거나 여자 캐릭터의 숫자가 더 많거나 동수인 시리즈가 한 편도 없다"는 것. 그는 이를 보며 "기업과 정부 기관에서 여성 관리자의 숫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여성 캐릭터의 절대적 수의 부족이 아니다. 적게는 1명에서 2명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이 여성 캐릭터의 외양과 내면까지 고정관념아래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씨는 "자주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파란색 외에도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등 다채로운 색깔과 모양을 부여받고 있지만 여자 캐릭터는 '핑크색'과 '리본'이라는 분명한 이미지가 있다"고 말했다.

<뽀로로>의 루피는 '핑크색' 비버고 '리본'도 했다. 패티는 핑크색과 보라색 망토를 두르고 장갑을 끼는 펭귄이다. <폴리>의 앰버는 핑크색 앰뷸런스다. 역시 리본을 했다. <코코몽>의 아로미도 핑크색 리본을 두른 토끼이고, <슈퍼윙스>의 아리는 핑크색 구급 헬기다.

김씨는 "실제로 핑크색 앰뷸런스를 본 적 있느냐"고 반문했다. 핑크색 앰뷸런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김씨는 이것이 "여자 캐릭터가 어떤 '기본형(디폴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부가적 여성형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여의사, 여직원, 여가수, 여배우처럼 여성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해당 직업의 주체로 인정받기보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히며 2등 인간 취급을 받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상어가족>의 '엄마' 상어는 '기본형'인 남자 상어에 분홍색 몸통, 속눈썹, 입술을 붙였다.

<상어가족>의 '엄마' 상어는 '기본형'인 남자 상어에 분홍색 몸통, 속눈썹, 입술을 붙였다. ⓒ 핑크퐁


교육용 콘텐츠로 제작된 핑크퐁의 <상어가족>도 예외는 없다. 핑크퐁의 <상어가족> 속에서 아빠 상어는 원래 상어의 색 그대로를 갖고 있지만 엄마 상어는 여전히 핑크색이고 눈썹과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디즈니 캐릭터인 미키와 미니, 롯데월드의 로티와 로리도 남녀가 짝인 캐릭터인데 여자 캐릭터에 단독자가 아닌 '남자 캐릭터의 여자친구'라는 지위와 리본을 준다."

김씨의 말이다.

여자는 요리를 좋아해?

핑크색과 리본으로 뒤덮인 이 캐릭터들은 외면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역할조차도 '여성'이라는 성별 아래 수동적으로 답습된다.

 반면 여자 캐릭터인 루피와 패티에게 '여자'라는 특징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들은 '여성스러운 성격 답게' 요리를 하거나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운동을 좋아한다.

반면 여자 캐릭터인 루피와 패티에게 '여자'라는 특징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들은 '여성스러운 성격 답게' 요리를 하거나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운동을 좋아한다. ⓒ EBS


<뽀로로> 속 루피는 요리를 좋아하는 여자로 등장한다. 소개란에 루피는 '수줍음 많고 여성스러운 성격에 요리 솜씨가 뛰어나며, 언제나 친구들을 상냥하게 돌봐주는 소녀 비버'라고 나와있다. 여성의 성적 고정관념에서 오차 범위 내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캐릭터 묘사다.

반면 같은 여성 캐릭터 패티는 루피와 달리 활달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하지만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털털한 성격에 어떤 운동이든 잘하는 활달하고 명랑한 소녀 펭귄이에요"라는 소개를 보아 패티에게도 '여성'이라는 특징이 빠지지 않는다.

김씨는 "말썽부리기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루피에게 몰려와 음식을 얻어먹는다. 쉬고 싶을 때도 친구들이 "네 음식이 맛있어!"라고 하면 피로를 무릅쓰고 요리를 해준다"고 말했다. 이어 "패티에게는 좀 더 활동적인 측면이 부여되긴 하나 모든 남자 캐릭터들이 '패티는 나를 좋아해!'라며 혼자 착각하고 대상화되는 그저 '예쁜 캐릭터'로 소비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말썽을 부리는 남자 캐릭터들를 그저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역할에 머무르다가 사건을 일으키는 쪽이 아닌 수습하고 도움을 주는 수동적인 캐릭터다. 김씨는 "이는 성인 여성도 사회에서 매일 같이 겪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토이트론에서 제작한 <뽀로로> 상품 '리틀퓨처북'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김씨는 "'리틀퓨처북' 속에서도 남녀 간에 역할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리틀퓨처북' 속에서 엄마는 친구들과 차를 마시는 모습을 그리고 아빠는 일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다. "여기서 엄마를 그리는 게 사회가 '맘충(엄마를 말하는 'MOM'에 벌레를 합친 단어. 여성, 특히 그 중에서도 '엄마'를 비하하는 말)'을 보는 시선을 그대로 답습한 거다."

<폴리>도 마찬가지다.

 <로보카폴리>의 캐릭터 설명

<로보카폴리>의 캐릭터 설명. 여기에서도 남성 캐릭터는 "누구보다 빠르고 용감한" "힘이 센" "호기심이 많은" 등으로 묘사되지만 여성 캐릭터는 "다친 자동차의 상처를 치료" "구조대원들의 수리 및 점검을 맡고 있는"으로 부차적으로 묘사된다. ⓒ EBS


여자 캐릭터만 늘려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김씨는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어린이 애니메이션에서 여자 캐릭터를 많이 늘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김씨는 "일단 여자 캐릭터를 세 명 정도 추가하는 게 먼저다, 그러면 다른 성격을 부여할 수밖에 없고 여성 캐릭터에 핑크색만 사용할 수 없고 다른 색깔도 줄 수 있게 된다"며 "숫자만 늘리면 다양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나오는데 가장 빠르게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뽀로로>와 <슈퍼윙스> 대신 아이에게 <행복한 퍼핀 가족>이나 <레고 프렌즈>, <마이 리틀 포니>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레고 프렌즈>는 여자 다섯이 주인공인데 성격도 다 다르고 여자들이 암벽등반을 하거나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며 "아이가 내게 '나도 저거 하고 싶다'고 말을 하더라, 여자아이들이 하는 거 보면서 자기도 암벽등반이나 농구를 할 수 있고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여자들만 나오는 만화가 아닌 성비가 동등한 만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남자들만 나오는 만화가 대부분이다보니 (여자아이들만 나오는 만화를) 보여주는데 사실 성비가 반반에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대접받는 만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 애들이 되고 싶은 건 소방차나 로봇, 수천 수만가지인데 여자애들이 되고 싶은 모델은 굉장히 한정적이다. 애들이 되고 싶은 모델을 만드는 건 애들이 아니라 결국 어른들이다."

성차별 뽀로로 슈퍼윙스 로보카 폴리 코코몽
댓글1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