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포스터 영화 <우리들>은 영화 속 '우리들'과 영화 밖 '우리들'을 비교하게 하는, 탁월한 영화이다.

▲ <우리들>의 포스터 영화 <우리들>은 영화 속 '우리들'과 영화 밖 '우리들'을 비교하게 하는, 탁월한 영화이다. ⓒ (주)엣나인필름


흔히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아이를 보면 꼭 주변 어른의 행실이 묻어나는 탓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주인공 삼아 세상의 어른들을 비추는 작품이 적지 않다. 한국만 해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동명 영화로 만들어져 명성을 얻었고 해외로 눈을 돌리면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 같은 작품이 즉각 떠오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중년의 내가 유년의 한 때를 회상하는 구성으로, 학급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는 엄석대와 그에 저항하다 포기하고 마는 나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정치 현실을 국민학교를 배경으로 우의적으로 풀어냈다는 평과 함께 1987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물론 여기에서 엄석대는 폭압적이고 비열한 독재자를, 나는 유약한 지식인을 상징한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도 비슷한 형식을 빌렸다. 소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25명의 소년이 겪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부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성의 법과 제도가 자리를 비운 곳에서 폭력과 비열함이 나약한 이성에 우위를 차지하는 모습은 작품을 접하는 이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되묻게끔 한다. 저자는 이 작품으로 198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연장선에 있다. 때 묻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사회가 실은 어른들의 세계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고, 심지어는 더욱 폭력적이고 비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상영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로부터 영화는 영화 속 '우리들'의 이야기를 영화 밖 '우리들'의 이야기로 끌어내 관객 앞에 펼쳐 보인다.

나, 너, 합쳐서 우리

우리들 어떻게 이런 연기를 했을까. 우리는 아이들의 세계 만큼이나 아이들의 능력 역시 과소평가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진은 지아(설혜인 분. 왼쪽)와 선(최수인 분. 오른쪽).

▲ 우리들 어떻게 이런 연기를 했을까. 우리는 아이들의 세계 만큼이나 아이들의 능력 역시 과소평가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진은 지아(설혜인 분. 왼쪽)와 선(최수인 분. 오른쪽). ⓒ (주)엣나인필름


<우리들>은 많은 이들이 일찍이 고민했음이 틀림없고 앞으로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관계 맺음'에 대한 영화다. 특별히 관계 맺음이 가장 서툴면서도 간절한 시기를 배경으로 삼아, 비슷한 경험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사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했기에 진솔하고, 관객 다수가 유사한 경험과 고민을 했을 거란 점에서 울림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초등학생 여자아이 선이다. 빠듯한 살림의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선은 내성적 성격 탓에 주변 아이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친구를 사귀고도 싶지만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는 보라와 그녀를 둘러싼 아이들의 따돌림에 마음만 다치기 일쑤다.

그런 선이의 삶에 한 아이가 발을 들여놓는다. 여름방학을 앞둔 마지막 날, 선이의 반으로 전학 온 지아가 바로 그다. 만약 운명이란 게 있다면, 선이는 그 만남을 기꺼이 운명이라 부를 것이다. 외톨이 선이의 삶에 불현듯 찾아와, 가장 비참했을 날을 가장 행복했던 날로 뒤바꾼 아이. 지아와 선이 함께 보낸 시간은 선과 지아, 그들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여름방학을 앞둔 마지막 날, 선과 지아의 첫날이었다.

방학 내내 둘은 함께였다. 서로의 손을 잡고, 힘껏 잡은 손을 흔들고, 그렇게 둘은 걷고 뛰며 놀았다.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방방이도 탔고 손톱에 봉숭아 물도 들였다. 둘만의 비밀도 만들고 사소한 다툼을 의미 있는 화해로 덮었다. 소녀들의 우정은 그네들이 함께 보낸 시간만큼 그렇게 쑥쑥 자랐다. 둘은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내보였고 그로부터 서로를, 또 자신을 이해해나갔다.

비겁해서, 나약해서, 자존심 때문에

우리들 보라(이서연 분. 왼쪽)와 그 패거리. 이 앙큼한 악역들은 맡겨진 역할을 100% 소화했다.

▲ 우리들 보라(이서연 분. 왼쪽)와 그 패거리. 이 앙큼한 악역들은 맡겨진 역할을 100% 소화했다. ⓒ (주)엣나인필름


좋은 날은 짧았다. 지아네와 선이네의 형편이 너무도 달랐다. 지아는 학원에 다녔고 선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벌어진 둘 사이엔 보라가 끼어들었다. 이후 영화는 선과 지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몇 가지 오해와 이간질 따위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데 둘 가운데 누구도 그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건너지 못한다. 자존심 때문에, 비열함 때문에, 나약함 때문에 그렇다.

선과 지아가 겪는 일련의 감정은 친구와 사귀고 또 멀어져 본 경험이 있는 많은 이들이 한 번쯤 겪었을 따위의 것들이다. 누군가는 선과 지아뿐 아니라 보라나 그녀의 친구들 위치에 선 적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 초등학교뿐이겠나. 우리 가운데는 20대, 30대의 선과 지아, 보라도 수두룩하다. 비겁해서, 나약해서, 자존심 때문에 깨뜨리고 잃어버린 관계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아직도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리들>은 큰 위안이 될 만한 영화다. 그리 새로운 문제 제기라거나 대단한 통찰이 엿보이는 작품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공감을 살 만한 진실한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만 많았지 영화 속 선이 만큼의 용기도 없는 이들이 이 세상엔 수두룩하게 빽빽하다. 가끔은 나도 그렇다.

인간관계에서 성숙하고 용기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만약 누군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그가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들 자타공인 신스틸러 윤(강민준 분). 송강호도 윤 역할을 민준이보다 잘 할 수는 없을 걸? ㅎ

▲ 우리들 자타공인 신스틸러 윤(강민준 분). 송강호도 윤 역할을 민준이보다 잘 할 수는 없을 걸? ㅎ ⓒ (주)엣나인필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주)엣나인필름 우리들 윤가은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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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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