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8년이면 한 생명이 태어나 두 발로 걷고 한국어와 영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중략) <여교사> 프로젝트는 좋은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고이 접었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시작됐다. 어떤 수면제도 소용 없었다." - 이경미 감독,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비밀은 없다> 제작기'(13일) 중에서

첫 장편 <미쓰 홍당무> 이후 8년이 지났다. 완성한 두 편의 시나리오와 셀 수 없을 정도의  미완성 시나리오들은 그에겐 희망이자 쌓아놓은 빚더미와 같았다. 미쟝센단편영화제 최우수상에 빛나는 <잘돼가? 무엇이든>(2003) 등 단편을 통해 재기발랄함은 이미 인정받았지만, 장편의 벽이 참 높았던 걸까. 그렇게 수많은 인고의 밤을 거쳐 이경미 감독은 <비밀은 없다>를 내놓았다.

지난 23일 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는 <비밀은 없다>는 감독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계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크다. 기존 문법에서 벗어난 비전 형성과 특유의 여성주의적 시각 때문이다. 다른 말로 풀어보면 뻔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 땅에서 분투하는 한 성인 여성과 청소년을 끈질기게 쫓았다.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과 섞어 놓은 채.

다소 낯설어 보일 수도 있는 이 '괴작'을 당당하게 내놓은 이경미 감독이 궁금했다. 개봉에 앞서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두 여성이 사는 서로 다른 세상

 영화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

영화 <비밀은 없다>는 이경미 감독이 오랜 시간 고민하며 내놓은 작품이다. "너무 작업이 안 돼 3일 넘게 잠을 못 잔 적도 있었다"고 그가 고백했다. 그 숱했던 불면의 밤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다. ⓒ 이선필


현재까지 관객들의 여러 평이 오가는 중이다. 호평과 악평이 정확하게 갈린다. 언론 시사 때도 그랬다. 이경미 감독은 <비밀은 없다>를 두고 나오는 다양한 평에 열린 자세를 취했다. "어떤 사이트에선 영화를 격렬하게 비판하더라"며 아쉬움을 내비쳤지만, 예상했다는 뉘앙스였다.

그의 영화가 낯설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스릴러 분위기를 취하면서 동시에 과감하게 그 특징을 비껴갔기 때문이다.

남편(김주혁 분)의 선거운동을 돕던 연홍(손예진 분)이 중학생 딸 민진(신지훈 분) 납치 사건을 겪을 때까진 영락없는 스릴러다. 당선 전략을 짜느라 아이 일에 소극적인 남편을 대신해 연홍이 직접 나선다. 납치범의 정체를 알아내기까지 나름 긴장감을 느끼게 하지만 범인의 정체가 쉬이 탄로 나고 만다.

정작 영화는 범인의 정체보단 사건 직전까지 민진이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딸이 납치된 후 연홍이 어떻게 타인의 편견과 무관심을 극복해 나가는지에 집중한다. 스릴러 공식을 파괴하면서 그 안에 드라마 요소를 강화한 셈이다.

"어른과 청소년이라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것 같지만,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둘 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세계지 않나. 경쟁 구도에 편입한 사람들과 거기서 소외되는 사람들 사이 권력관계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뛰는 모습이 모두 잔인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지역적 베타성도 이겨내야 했고(연홍은 전라도 태생이지만 남편의 선거구는 경상도 지역이다-기자 주).

아이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수단이 어른들이 쓰는 그것과 매우 비슷해 보였다. 다만 아이들의 보송보송한 감성이 어른들 이야기 속에 살아있기를 바랐다. 순정만화처럼 보이길 원했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색감도 아이들 이야기와 어른들 이야기 때 확연하게 구분된다. 하나는 핑크 다른 하나는 블루다."

아이디어의 기원

 영화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

박찬욱 감독과 이경미 감독의 인연은 제3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 감독은 이경미 감독의 단편을 보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박 감독 제작사에 이경미 감독이 합류하게 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스크립터 등을 거치며 이경미 감독은 영화 경력을 쌓아갔다. ⓒ 이선필


이 작품의 기원은 4년 전 시나리오 작업을 끝냈던 <여교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제 차제가 다르다. <비밀은 없다>가 연홍과 그의 딸 이야기가 교차한다면 <여교사>엔 사이코패스 노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선생과 함께 그 노인이 사건의 핵심 캐릭터다. "아이를 유괴한 노인을 한 엄마가 잡는 이야기였다"고 이경미 감독이 전했다.

그래서 투자가 어려웠다. "노인과 여성 캐릭터의 캐스팅이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8년 간 감독이 고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이경미 감독은 전세금을 80% 가까이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때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박찬욱 감독이 손을 뻗었고, 정치인들의 총선 설정을 넣고 보조 캐릭터를 주요 인물로 꺼내면서 지금의 작품이 됐다.

"제일 힘들 때 전화를 주셨다. 그때 유일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이 박 감독님뿐이었다. 영화 작업 중 시나리오가 가장 힘들다(웃음). 다른 건 상호 소통을 할 수 있는데 이건 혼자만의 싸움이니까. <여교사>의 서브플롯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하셨고 여러 차례 수정했는데 생각만큼 잘 안 풀렸다. 근데 박찬욱 감독님이 미국을 배경으로 리메이크하면 어떨지 물으시더라.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내 이야기를 완성도 못 했는데 리메이크 작품부터 나온다니! 그래서 하시고 싶으면 이 작품이 완성되는 것부터 도와주시라 부탁드렸다. 그래서 함께 쓰기 시작한 거다."

즉 지금의 <비밀은 없다>엔 박찬욱 감독의 공도 들어가 있다는 의미다. "<미쓰 홍당무> 이후 죽어라고 글만 썼"던 이경미 감독은 "자기 검열을 심하게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더는 쓸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 박찬욱 감독이 고삐를 푸는 역할을 한 것이다.

여성이라는 신대륙

 영화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

두 번째 장편을 놓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차기작은 보다 수월하게 작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하고 빠른 전개 위주인 한국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 이선필


'여성 감독', '여성 캐릭터 중심인 작품'. 이경미 감독은 이런 구분을 크게 염두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연스럽게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보면 공통적으로 남성 감독이라면 쉽게 묘사할 수 없는 여성 캐릭터의 이면이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사건에 그저 반응하고 마는 게 아닌 주체적으로 판을 짜고 부딪치며 해결하려는 인물말이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경미 감독에게 내재된 진짜 여성주의 아닐까.

"<비밀은 없다> 안에서 여자를 분리되고 약하고 소외된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단면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람들의 편견들을 넣고 싶었고, 그것과 싸워서 극복하고 이기는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다. 음…. 내 무의식이 영화에 반영된 건가? 하는 생각이 최근에서야 들었다.

내 영화에 왜 여성들이 주인공이냐고? 남성 캐릭터는 이미 너무 많고 여자는 잘 보이지 않아서일 거다. 그러다가 여자 캐릭터가 다양해지고 많이 나온다면, 난 또 남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만들 거다! (웃음)"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개척하는 여성. 어쩌면 온전한 인간으로 그저 이경미 감독은 여성을 바라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한국 영화가 그간 닿지 못했던 여성 캐릭터의 신대륙을 끈질기게 탐험해 온 자의 여유랄까. 다행스럽게도 이경미 감독을 비롯해 최근 개봉한 몇몇 영화들에서 그 싹이 보인다.

물론 이경미 감독 스스로는 여성주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아 보였다. 그가 써놓았다는 여러 시나리오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SF 코미디물, 재난물 등 이경미 감독이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전작들과는 또 다른 주제와 분위기였다. "바로 이어서 하고픈 이야기? 아마 발랄하면서도 좀 센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넌지시 귀띔했다. 적어도 8년보단 훨씬 짧은 시간 내에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보태어 본다.

알면 더 재밌다 <비밀은 없다> 세 여성 캐릭터의 비밀
영화 속 캐릭터 이름은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설정 중 하나다. 많은 감독들이 작명이라 부를 만큼 캐릭터 이름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비밀은 없다>도 마찬가지다.

우선 정치인의 아내이자 사건의 중심인 주인공 연홍은 바로 조선 시대 기생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경미 감독은 "도발적이면서도 순응적인 느낌을 원해서 하루종일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발견한 이름"이라며 "성까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기생의 이름 중 하나를 따왔다"고 밝혔다.

"극중 연홍이 가수를 꿈꾸다가 정치인의 아내가 되잖아요. 나름 예술적 재능도 있고 야심도 있는 여자죠. 그 느낌이 이름에 담긴 거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야심은 있지만 직접 나서진 못하고 정치인의 아내 정도를 꿈꾸는 인물이에요."

연홍의 딸인 민진은 최근 중학생 나이의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쓰는 이름 중 하나다. 그만큼 보편성을 고려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민진의 친구이자 함께 밴드를 구성해 기이한 음악을 선보이는 미옥(김소희 분)은 한 음악 앨범에서 따온 것이다. 이미경 감독은 "박찬욱 감독님 댁에서 같이 시나리오를 쓰다가 발견한 음반이었는데 거기서 따온 것"이라 말했다.

이경미 감독의 영화엔 음악이 매우 중요하다. <미쓰 홍당무> 땐 직접 음악 선곡과 효과음을 배치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애착이 크다. <비밀은 없다>에도 여러 기이한 소리가 담겨있는데 이 감독은 "아마 절반 이상 분량에 음악이 깔려 있을 것"이라며 "아이의 허밍 소리 역시 촬영 전부터 연습시켜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엔 그 허밍음이 몇 차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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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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