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의 포스터.

영화 <우리들>의 포스터.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호평받고 있지만, 이 영화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 아토


영화 <우리들>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영화관 입구에 그려진 인상적인 포스터 때문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의 비밀의 화원 혹은 동성애적 연대를 그린 듯한 화려한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전단지를 읽어보니 각종 국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고, '한국의 고레카노 히라카즈(영화 <그리고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모른다>를 만든 일본 감독, 아이들의 세계를 탁월하게 그려내기로 유명하다) 탄생'이라는 구절도 눈에 띄었다. 이미지와 관련 정보가 살짝 혼란스러웠지만 어느새 극장에 들어와 있었던 걸 보니 나름 나쁘지 않았던 긴장이었던 것 같다. 나는 영화가 적어도 그 중간 어디쯤에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는 그 어딘가에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평단이나 관객 모두에게 강한 지지를 받을 것 같은 영화였다. 주류영화와는 다른 사회적 소재임에도 이야기를 힘있게 이끌어 나갔고 연출도 유려했으며 메시지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강하게 환기 시키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영화를 본 관객 누구라도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게 분명해 보였다.

포스터의 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이 영화는 헬조선의 교실 한가운데 놓인 한 왕따 소녀의 이야기였다. 선은 또래들에 비해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고 핸드폰도 없기에 따돌림을 당한다. 할아버지의 병환으로 집안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피구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선택되는 아이였기에 친구들은 밟지도 않은 선을 밟았다고 몰아붙인다. 이해심 많은 엄마가 있어 버팀목이 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반 친구 보라의 생일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대신 청소를 하지만 받아든 것은 아무렇게나 적어준 어느 아파트의 주소였다. 그러던 어느날 방학식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선은 전학생 친구 지아를 만나게 된다.

긴장감 넘치는 도입부

 영화 <우리들>의 한 장면.

영화 <우리들>의 한 장면. <우리들>의 도입부는 분명 훌륭했다. ⓒ 아통


영화 도입부를 보며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었다. 특별한 사건에 기대지 않았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아이가 꽤 괜찮은 아파트에서 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아무렇게나 집에 놓여있는 소주병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방학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면 두 친구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만으로도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 한 인물이 세계에 놓여있는 방식만으로도 이야기가 짜여 나가고 있었다.

영화 <도희야>에서 섬마을 경찰서장에 취임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동성애로 인한 좌천임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강렬한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 자체가 세상과 갈등하고 있는 구도이기에 아무리 사소한 것도 의미심장해 보였다. 왕따는 동성애 혐오에 비해 평범하지만 더 노골적으로 한국사회의 공포와 욕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아는 방학을 마치기도 전에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고 보라와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지아는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선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지아는 부유했지만 이혼한 부모는 딸에게 관심이 없다. 그로 인해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지아는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선의 편에 서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지아 역시 보라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게 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투면서 쌓인 앙금은 두 소녀를 더욱 멀어지게 한다.

좋은 부모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영화는 차별과 멸시가 한 소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선의 입장에서 충실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가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이룬 성취는 집단 따돌림 문제에 있어 좋은 부모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그려내는 점이었다. 선의 엄마는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쿨하고 좋은 부모였다.

그럼에도 선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부모들은 이미 아이들의 세계를 잊어버렸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사회적이다. 선은 가난했고 한국 사회는 가난을 혐오하며 두려워하는 사회다. 강력한 경쟁체제는 끊임없이 서열의식을 조장했고 그 체계는 아이들의 세계에도 스며들어 버린다. 그 상태로 사회자체가 역동성을 잃어버리는 시점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신분제적 속성을 띠게 된다.

교실 안 선의 모습은 형식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신분제적 차별이 갑질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우리사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엄마가 소용이 없는 이유는 이런 가난이 아이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짐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마의 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모의 시대와 선의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난했지만 기회가 있었던 시대와 준 세습적 신분사회와의 차이가 그것이다. 

좋은 이야기로 충분치 않았다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  있는 작품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좀 머뭇거려진다. 왜냐하면 우선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방식에 과잉이 있어 보인다. 중반 이후로 사건이 지나치게 많이 이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훔친 크레파스, 소주병, 실 팔찌, 부모의 이혼 등 긴장감을 유발했던 극적 요소들을 모조리 사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영화가 아이들의 세계를 잘 그려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아이들의 이야기일까?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 대사들을 어린 배우들의 말로 고쳤다고 하고, 현장의 즉흥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 영화를 아이들의 세계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 현장성에서 나온 일종의 착시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왕따라는 시스템의 작동 구조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잊었던 어떤 세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열광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는 짧은 시간동안만 아이들의 세계로 재빨리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잘 이해가 된다는 것은 그 세계가 어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어른들의 환상이기에 가능한 건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고통을 다루었다는 것에서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이야기는 상당부분 전형적이었고, 그렇기에 더 나아간 부분에 대해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거들었을 뿐이다. 감독의 세계 안에서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의 차이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포스터. <우리들>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영화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포스터. <우리들>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영화이다. ⓒ (주)티브로드폭스코리아


그런 문제점은 고레카노 히라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 영화는 성취지향적인 비즈니스 맨 료타가 진정으로 부모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피아노 연주회에서 다른 친구를 칭찬하는 아들 케이타에게 너는 분하지도 않냐고 묻는 아버지였다. 그는 일이 더 중요했고 케이타가 엘리트 코스를 걷기 위해 더 경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병원의 실수로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친자는 류세이. 류세이는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고, 뭔가 허술해 보이지만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따뜻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났다. 두 가족은 시간을 두고 교류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료타의 강한 의지로 결국 아이들을 바꾸게 된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류세이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류세이는 규율만을 강조하는 료타에게 가벼운 적의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료타는 온순한 케이타와는 달리 자신을 미워하는 류세이에게 사랑받고 싶어한다.

마침 회사에서는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료타는 아이를 위해 텐트 설치법을 배우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낚시를 같이 하고, 류세이의 장난감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기로 놀고 있는 류세이를 찍기도 한다. 어느날 료타는 보관된 사진을 훑어보다 자신이 찍혀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쇼파에서,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자신의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케이타가 찍은 사진이었다.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어차피 우리는 아이들의 세계 자체를 그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살아있는 무언가에 가까운 것을 그릴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들>에서 그런 장면이 떠오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기에는 감독이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의 구심력이 너무 강해 보였다. 그래서 모두들 좋아하는 대사일 것 같은 '그렇게 때리면 언제 놀아?' 라는 어린 동생의 대사에서도 어른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다. 또래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이들의 대사는 많지 않다. 감독은 아이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애정을 담아 바라보는 만큼은 알고 있다. 아이도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말은 하지 않아도 아이도 노력하고 있고,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원하지 않는 일도 한다. 그리고 아빠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료타가 케이타를 찾아갔을 때 케이타는 집밖으로 뛰쳐 나가버린다. 료타는 케이타를 따라 한참을 걷다 아래위로 나뉜 길을 걸으며 사과한다. 케이타가 만들어준 종이꽃을 잊어버려 미안하다고, 아빠 사진 찍어준 것도 안다고, 자신도 어렸을 때 피아노 그만두었었다고, 이제 미션은 끝이라고 말이다. 길은 합쳐지고 료타는 케이타를 안는다.

빈틈없는 스토리, 그게 한계다

집단 따돌림이라는 현상에는 명백한 원인으로 포섭되지 않는 어떤 구멍이 존재한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중학생 또래 소년들에게 '자아' 비슷한 어떤 것이 생길 때의 알 수 없는 폭력성을 그린다. 극중 한 소년은 친구들과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온 후 갑자기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극중에서는 그에 대한 어떤 뚜렷한 원인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 <우리들>의 촘촘한 이야기와 강한 서사적 구심력은 감독이 그려놓은 세계 이상의 다른 어떤 것도 그 속에 담길 수 없도록 차단시켜 버린다. 왕따라는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를 어린 배우들과 함께 생동감 있게 그려낸 이 영화가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현상이 서사에 묶여 들어가는 순간 세계는 왠지 손에 잡힐 듯도 하다. 하지만 그 순간 서사 바깥에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존재는 증발된다. 이는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한번뿐인 삶 또한 나름의 서사를 만들어 나가며 버티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쉽고 편리한 서사들이 넘쳐나는 시대, 이것이야 말로 한낱 영화 이야기에도 가끔은 엄격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슬로우 뉴스에 송고한 기사입니다.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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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의존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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