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는 위대했고 리오넬 메시는 외로웠다. 2년 연속 동일한 결승무대에서 동일한 상대, 동일한 방식으로 운명이 갈렸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 역시 동일했다.

칠레는 27일(한국 시각) 미국 뉴저지의 멧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6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었다. 정규 시간을 0-0으로 마친 칠레는 승부차기 끝에 4-2로 승리하며 대회 2연속 우승을 거머쥐었다.

칠레는 지난해도 코파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만나 승부차기 끝에 4-1로 승리한 바 있다. 메이저대회에서 2년 연속 결승전에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참으로 보기 드문 장면이다.

1년 만에 그대로 재현된 그림

2016 코파 아메리카컵 대회 지난 26일 미국 뉴저지 이스트 러더포드의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코파 아메리카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리오넬 메시가 추가 시간에 괴로워 하고 있다.

▲ 2016 코파 아메리카컵 대회 지난 26일 미국 뉴저지 이스트 러더포드의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코파 아메리카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리오넬 메시가 추가 시간에 괴로워 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사실 지난해 우승을 차지하고도 디펜딩챔피언의 자격을 1년 만에 유지하지 못한 칠레로서는 다소 손해 보는 느낌으로 시작한 대회였다. 하지만 보란 듯이 2연패를 차지하며 남미 최강의 자격을 스스로 입증했다. 지난해 개최국 어드밴티지와 각종 구설수 속에 우승했다는 논란을 완전히 불식시킨 데다, 이번 대회가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중미까지 아우르는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 코파에서 다시 우승했기에 더욱 뜻깊은 의미가 있었다.

칠레는 이번 대회 내내 우승할 자격이 충분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아르헨티나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1-2로 패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조 2위로 무난히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 지었다. 칠레의 진정한 진가는 단판 승부에서 빛을 발했다.

칠레는 8강에서 북중미 최강으로 꼽히던 멕시코를 무려 7-0이라는 베이스볼 스코어로 완파하며 진가를 드러냈다. 준결승전에서는 역시 또 다른 우승후보로 꼽히는 콜롬비아를 2-0으로 제압하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조별리그에서 매 경기 실점(5골)을 허용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칠레 수비는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을 포함하여 토너먼트 3경기에서는 강팀들을 상대로 단 한 골도 내주지 않는 철벽 수비를 선보였다.

결승에서 다시 만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칠레는 특유의 부지런한 활동량과 역습으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전반 28분 만에 마르셀로 디아스가 퇴장당하는 악재가 발생하며 경기의 흐름이 깨지는 듯했지만 칠레는 끈끈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비수 마르코스 로호가 거친 플레이가 퇴장당하며 수적 균형을 회복했고 이후로는 오히려 칠레의 볼 점유율이 더 높아졌다.

특히 골키퍼 클라우디오 브라보의 결정적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브라보는 경기 내내 안정된 수비와 동물적인 선방으로 아르헨티나의 득점 기회를 차단했다. 특히 최대 위기였던 연장 전반 10분경 세르히오 아게로의 예리한 궤적의 헤딩 슛을 막아낸 것은 이날의 최고 명장면이었다. 브라보는 승부차기에서도 아르헨티나의 4번 키커 루카스 비글리아의 슛을 봉쇄하며 팀의 승리를 이끄는 수호신이 됐다.

칠레는 이번 대회 팀의 2연패는 물론이고 개인상까지 휩쓸었다. 득점왕은 6골을 넣은 에두아르도 바르가스가 차지했고, 최우수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골든 글러브는 칠레의 브라보에게 돌아갔다. 대회 최우수선수 역시 3골 2도움을 기록한 알렉시스 산체스가 선정됐다. 남미의 복병 정도로 여겨지던 칠레는 이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축구의 강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계속된 불운, 누구의 탓인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메시와 아르헨티나의 불운도 빼놓을 수 없다. 아르헨티나는 1993년 마지막 코파 우승 이후 23년째 이어가고 있는 메어저대회 무관 행진을 올해도 극복하지 못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과 2015 코파에 이어 벌써 3년 연속 준우승이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월드컵에서 '독일 공포증'에 시달렸던 아르헨티나는 코파에서는 칠레에게 2년 연속 승부차기로 덜미를 잡히며 새로운 징크스를 안게 됐다.

아르헨티나의 우승 실패나 누구보다 안타까운 사람은 바로 메시다. 클럽 무대에서 이미 펠레나 마라도나를 훌쩍 뛰어넘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메시지만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메어저대회에서는 연령대별 대회였던 2008 베이징올림픽을 제외하고 한 번도 우승해보지 못했다.

지난 브라질월드컵과 2015 코파에 2연속 최우수선수에 선정되고도 우승 실패로 고개를 숙인 메시는 이번 대회 역시 5골 4도움으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나 정작 결승전에서는 침묵했다. 특히 이날은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서서 실축까지 저지르며 졸지에 팀 패배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메시의 부진만을 탓하기에는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메시 의존증'이 우승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아르헨티나가 칠레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디아스의 퇴장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전반 42분 로호가 비달에게 무리한 백태클을 저지르며 다이렉트 퇴장당하면서 수적 우위 속에 기세를 올리던 아르헨티나의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10 vs. 10의 싸움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오히려 칠레가 원하는 페이스대로 경기가 진행됐다. 아르헨티나는 메시의 개인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한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대회 내내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라베치가 미국전 부상으로 이날 결장했고, 선발 출전한 앙헬 디 마리아를 후반 이른 시간에 수비형 미드필더 크라네비테르와 교체한 것도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더욱 단조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메시의 득점부담을 덜어줘야 할 이과인과 아게로는 이번에도 중요한 순간에 끝내 침묵했다.

메시가 터지지 않을 경우 전술적 대안이 없다는 아르헨티나의 약점이 또다시 발목을 잡은 셈이다. 승부차기 실축 이후부터 얼굴을 감싸 쥐며 내내 불안정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던 메시는 끝내 팀의 패배가 확정된 이후 아쉬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메시가 감정을 드러내며 우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다. 그만큼 우승에 대한 메시의 간절함과 압박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메시는 경기 후 돌연 아르헨티나 대표팀 은퇴 의사까지 밝힌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결승전 직후에 발표된 메시의 은퇴 의사가 3년 연속 우승 실패에 따른 감정적인 발언인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의지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메시는 아직도 만 29세에 불과하다. 향후 3~4년 정도는 충분히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은퇴 언급이 다소 성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메시가 은퇴할 경우 당장 진행 중인 러시아 월드컵 남미 예선에도 타격을 미치게 된다. 또한, 메시의 은퇴와 더불어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등 대표팀 동료 선수들도 줄줄이 은퇴 가능성이 내비치고 있어서 자칫하면 아르헨티나 축구협회가 브라질 이상 가는 엄청난 코파 후폭풍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고의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유독 국가대표팀에서만 작아지는 메시의 불운이 안타까움을 전해준다. 과연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은 메시의 국제대회 우승 도전을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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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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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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