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었던 아비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다른 사람이 된 듯 행동하는 딸을 위해 굿판을 마다치 않는다. 외지인의 방문에서 시작된 마을의 소문은 자식 사랑에 미혹된 그를 다짜고짜 일본인의 산막으로 들이닥치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소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굿당에 버금가는 기묘한 제단과 조우한다. 영화 <곡성(哭聲>의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독초를 의심하는 대신, 무당을 불러들인다. TV 속에서 보도된 독버섯에 대한 해명은 그저 해명일 뿐이다.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과학은 그들로 하여금 조상들이 하던 대로 하게 만든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아직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 인류의 조상은 자신들이 해명할 수 없고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의 신묘한 현상에 '신'의 위치를 부여했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무한한 상상력으로 신이 창조된 것이다. 그런 신화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었던 우주, 자연 만물을 신을 매개로 독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조지프 캠벨은 인간이 그다지 행복해지지 않은 이유를 '신화의 실종'에서 찾고 있다. 과학은 세상을 독해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의 불가지한 영역은 확장돼가고, 그 속에서 신화와 신을 잃은 인간은 방황하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21세기 곡성에서 벌어진 굿판이 사람들을 쉽사리 흡인하듯이, 알파고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곡성>의 종구 일가처럼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더구나 그 일이 내 일일 때, 이성적인 판단을 촉구하는 신부보다 당장 눈앞에서 귀신을 쫓아주겠다는 무당의 호언장담이 더 솔깃한 건 인지상정이다.

<곡성> 종구가 그랬듯, <운빨 로맨스> 심보늬도 그랬다

 MBC 드라마 <운빨 로맨스>의 황정음은 미신에 빠진 심보늬 캐릭터를 연기한다.

MBC 드라마 <운빨 로맨스>의 황정음은 미신에 빠진 심보늬 캐릭터를 연기한다. ⓒ MBC


종구가 그랬듯, <운빨 로맨스> 속 여주인공 심보늬(황정음 분)도 그랬다. 1회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불경' 벨소리에,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금을 뿌려대는 이 여자. 말끝마다 "운수가 어때서", "방향이 흉해서", "오늘의 운세가"라고 말을 하는 심보늬는 종구 일가 못지않게 중증이다. 이십대 처자가 할 행동이라기에는 공감하기 힘든 그녀의 행동들은 1회 말에 가서야 그 이유가 드러난다. 그녀 역시 종구처럼 불시에 가족을 잃고 남은 가족마저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젊은 세대조차 앱으로 오늘의 운세를 보고 부적을 다운받는 세상에, "네 운수가 사나워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점술가의 서슬 퍼런 단언에 과연 단호하게 그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경찰도 대번에 일본인에게 낫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겨우 스무 살을 넘긴 여성에게 벌어진 가족의 참사는 불가항력이다.

황정음의 좌충우돌 해프닝으로 어수선했던 <운빨 로맨스> 1회는 그럼에도 황당한 운빨에 기대 살아가는 '지지리 운 없는' 보늬의 캐릭터를 한국 보편의 정서로 설득해낸다. 고군분투하는 가난한 여주인공 캐릭터야 MBC <지붕 뚫고 하이킥>이래 최근 <그녀는 예뻤다>까지 황정음의 전매특허지만, '운빨'을 곁들이니 싹둑 자른 머리만큼이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류준열의 과제 : 스테레오 타입 캐릭터의 극복

하지만 운 나쁜 보늬만으로 로맨스 드라마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모든 로맨스 드라마가 그렇듯 운에 기대 사는 여주인공 맞은편에, 전혀 그렇지 않은 남주인공이 등장해야 한다. 그 주인공은 천재적인 두뇌, 모든 것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게임회사 CEO 제수호다.

등장하자마자 카지노서 머리 좋은 척을 하다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여주인공과 부딪혀 오물을 뒤집어쓰고, 불성실한 직원들을 마구 대하다 그의 태도에 불만을 느낀 직원들로 인해 게임 시연회를 망쳐버린 CEO. 거기에 한 술 더 떠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조명 받아 내면의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 그가 바로 '호랑이띠'라는 이유로 보늬와 얽힐 인연의 주인공이다.

류준열이 연기하는 <운빨 로맨스>의 제수호는 딜레마다. 트렌드에 맞게 게임회사 CEO에 여주인공에 대적해 이성에 절대 의존하는 수학 천재라지만, 제수호의 캐릭터는 다소 평범하다. 잘 나가는 부자에, 싸가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제수호는 류준열이 자유롭게 연기할 거리를 거의 주지 않는다. <운빨 로맨스>는 원작 만화의 짠돌이 집주인 제택후 대신, 일반적인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적인 남자 제수호를 주인공 삼는다.

덕분에 <운빨 로맨스>는 황정음이 연기하는 심보늬라는 신선한 여주인공 캐릭터와 사연에 로코의 공식과도 같은 제수호를 결합해 신선하지만 안전한 방식을 도모한다. 하지만 2회를 본 결과 <운빨 로맨스>에 안심하고 마음을 맡길 수 없는 이유 또한 이런 어정쩡한 결합에서 비롯된다. 심보늬와 엮이게 되는 제수호가 어쩐지 뻔해 보이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를 방지하고자 제수호를 심보늬가 찾아 헤매는 호랑이띠 남자로 만들고, 그녀가 제수호의 회사 '제제팩토리' 공채 1기였다는 사연까지 얹어준다. 뻔한 여정을 알면서도 속아주며 가는 것이 로맨스 드라마 시청자의 몫이라지만, <운빨 로맨스>의 첫 여정은 아직 두 팔 벌려 함께 하기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잘생김을 연기하는' 류준열이 제수호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조차 극복한다면 그는 <응답하라>의 저주를 풀 주인공이 되겠지만, 아직 미지수다.

 MBC 드라마 <운빨 로맨스> 포스터.

MBC 드라마 <운빨 로맨스> 포스터. ⓒ mbc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운빨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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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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