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의 신작 <곡성>은 분위기로 관객을 공포 속에 몰아넣는다.

나홍진의 신작 <곡성>은 분위기로 관객을 공포 속에 몰아넣는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공포는 실체가 아닌 분위기가 야기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송곳니를 드러낸 검은 망토의 귀족 흡혈귀 드라큘라가 아닌 바로 앞도 분간키 어려운 트란실바니아의 캄캄한 침엽수림 속 적요다. 정말 무서운 건 소복한 처녀귀신이 아닌 안개 낀 공동묘지 웃자란 풀 위로 소리 낮춰 불어오는 바람이다. 드라큘라와 처녀귀신이 '실체'라면 울울창창한 침엽수와 잡초를 훑는 스산한 바람은 '분위기'.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바로 이 '공포의 분위기'를 제대로 맛본 적이 있다. 몇 해 전 여행한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 북서쪽에 노비사드(Novi Sad)란 조그만 도시가 있다. 반짝이는 물결로 흐르는 다뉴브강과 수령이 족히 1천 년은 넘었음직한 거대한 나무 수백 그루가 강변에 줄을 지어 선 목가적인 마을.

낮에 본 서정적 풍광이 머릿속에 남아,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숙소를 벗어나 홀로 강변을 따라 걸었다. 동유럽 '밤의 낭만'을 즐겨볼 요량으로. 그런데, 포도주에 취해서였을까? 걷다보니 시내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인적이 끊긴 것은 물론, 개 한 마리 짖지 않는 고요함 속에 혼자 서 있었다.

햇살 아래서 본 것과 달리 밤의 다뉴브강은 칠흑처럼 검었고, 당장이라도 물속에서 무언가가 튀어오를 듯 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주던 거대한 나무들. 거기서 뻗어 나온 가지는 음습한 그림자를 드리운 악마의 손가락처럼 보였다. 누가 칼이나 총을 겨누고 협박하는 것도 아닌데, 무서웠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인도 뭄바이 나이트클럽에서 덩치가 코끼리만한 나이지리아 청년 셋에게 멱살을 잡혔을 때도, 베트남 후에의 새벽 거리에서 술에 취한 백인들 여럿에게 인종차별적 욕설을 들었을 때도 기죽지 않고 대항하던 '조선 남아의 기개'가 농밀한 밤의 흑갈색 어둠과 강과 고목이 만들어낸 절벽 같은 침묵 속에서 꺾였다. 그건 분명 실체가 아닌 분위기가 야기한 두려움이었다.

다시 맛본 동유럽 어두운 강변에서의 공포감

영화 <곡성>을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있던 2시간 36분. 그중 절반이 노비사드 다뉴브강변에서 겪었던 혼란스런 감정과 다시 만난 시간이었다. 데자뷰(dejavu) 같았다. 실체가 아닌 분위기가 주는 공포. 영화를 보며 무서워해본 적이 이전에 있었던가?

 <곡성>의 한 장면. 배우 천우희는 다시 한 번 '정점을 짐작키 어려운 연기'를 선보인다.

<곡성>의 한 장면. 배우 천우희는 다시 한 번 '정점을 짐작키 어려운 연기'를 선보인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개봉 6일만에 23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끌어 모은 영화, 입을 가진 평론가와 영화담당 기자 거의 대부분이 한 번씩은 언급한 영화, 포털사이트와 영화 관련 인터넷 홈페이지를 중구난방 하는 네티즌의 감상평. 이쯤 되면 고만고만한 '<곡성> 리뷰 하나'를 더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자칫 스포일러나 될 뿐.

영화 <곡성>을 놓고 주인공 경찰(곽도원 분)의 행위를 합리적 범주에서 해석하려 한다거나, 한국 무당(황정민 분)이 악의 편에 선 것인지 선량한 사람인지 갑론을박 한다거나, 가톨릭과 샤머니즘의 충돌에서 누가 승리한 것인지 논쟁을 벌이는 건 지금 시점에선 무용하다. 나홍진의 연출은 이 모든 '극적인 논란'을 예상한 듯 '열린 결말'로 치닫고 있으니까. 평자(評者)에 따라 백이면 백, 천이면 천 가지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게 <곡성>이니까.

해서, 여기선 등장 분량과 관계없이 관객들에게 '분위기'로서의 공포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 두 사람, 배우 천우희와 쿠니무라 준에만 포커스를 맞춰 보고자 한다.

영화에 압도돼본 드문 경험... 벌써 기다려지는 나홍진의 차기작

<곡성>에서 천우희가 등장해 연기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 분량의 10% 남짓이나 될까? 대사는 더 적어서 그녀가 입을 열어 말하는 건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 두 번이 전부다. 그럼에도 천우희가 연기한 '이름 없는 여자'는 영화 전반을 어둡고 묵직하게 가라앉히는 유령선 닻의 역할을 한다.

'실재'하는 인간인지, '허상'의 존재인지 파악되길 거부하는 여자. 천우희는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의 시골마을, 귀뚜라미 우는 어두컴컴한 골목길, 마른 나무 우거진 숲을 넘나들며 그 이질적 공간 모두를 '공포의 빛깔'로 채색해버린다. 몸짓과 표정만으로 단숨에.

실상과 허깨비의 중간지점에 선 그녀는 조그만 몸피에서 뿜어내는 눈빛 하나로 <곡성>의 공간적 배경을 트란실바니아의 침엽수림이나 키 큰 잡풀 우거진 바람 부는 공동묘지로 이동시킨다. 천우희 연기의 정점에 어디쯤 있는지 짐작하는 건 범인(凡人)의 몫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것. 그 놀라운 에너지가 '분위기가 주는 공포' 조성에 일등공신임을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듯하다.

 쿠니무라 준. 그의 연기는 <곡성>의 '공포로 달려가는 분위기'에 가속도를 붙인다.

쿠니무라 준. 그의 연기는 <곡성>의 '공포로 달려가는 분위기'에 가속도를 붙인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접시 가득 발톱을 뽑지 않은 닭발 수십 개를 삶아두고 그걸 씹으며, 경찰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답하는 쿠니무라 준의 얼굴은 진원지가 불분명한 불쾌감과 공포를 동시에 일으킨다.

폭발하듯 반인반수처럼 울부짖는 역동성과 끊임없이 안으로 숨어드는 정적인 침잠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쿠니무라. 그의 연기엔 어색함이나 억지스러움이 완벽하게 거세돼 있다. 그 자연스러움이 '공포로 달리는 분위기'에 가속도를 붙였음은 불문가지. <곡성>을 본 후 쿠니무라 준에 관한 정보를 찾아봤다. 예순한 살의 일본 중견배우. '어째서 저처럼 연기 잘하는 배우를 여태 몰랐던가'. 필자의 과문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길어진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됐다. 해석을 거부하거나, 불허하는 영화 <곡성>. 꿈인 것도 같고, 현실인 것도 같은 그 공포의 숲길을 헤맨 시간이 행복했다고 하면 지나친 찬사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한국 영화를 보고 그 작품이 주는 압도적인 무게감에 이처럼 설렌 적이 이전에 있었던가? 필자의 기억 속엔 없다. 나홍진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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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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