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히어 애프터> 스틸컷 욘은 자신이 죽게 한 여학생의 어머니를 찾아가 쌓아둔 울분을 터뜨린다. ⓒ (주)엣나인필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행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상대방이 저지른 죄악의 피해당사자가 자기 자신이라면 말할 나위 없고, 자신의 가족이나 연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우리 엄마'를 욕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지 않은가. 하물며 만약 그 죄악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면(이를테면 누가 내 가족을 죽게 하거나 불구로 만들었다면) 어떨까. 법적 처벌과 무관하게, 가해자를 향한 원망을 떨쳐 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영화 <히어 애프터>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소년 욘(율리크 먼더)의 이야기다. 욘은 2년 전 같은 동네 또래 여자아이를 죽게 했고, 영화는 복역을 마친 열일곱 살 욘이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욘은 다시 가족과 함께 살고, 이웃과 마주하고, 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과거 사건 때문에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욘은 1년 전 전학 온 여학생 마린(로아 에크)과 점점 가까워지고 그를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조금씩 치유하게 된다.
▲ 사건 이후 전학온 마린은 선입견 없이 욘을 대하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 (주)엣나인필름
<히어 애프터>는 내내 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렇다고 애정(혹은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는 않는다. 과거 욘이 저지른 사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을뿐더러, 하다못해 그 흔한 플래시백(flashback, 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조차 없다. 욘을 변호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근거가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욘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부당한 처우에도 반박할 수가 없다. 그를 경멸하거나 무서워하는 동급생들을 비롯해 은근히 욘에게 거리감을 두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는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자'인 것이다.
관조적인 영화의 태도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가된다. 2년 전 사건 이후 전학 온 마린이 선입견 없이 욘을 대하면서 그를 위로하는 모습에서는 한 줄기 빛이 보인다. 하지만 죽은 여학생의 어머니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욘에게 강한 증오심을 드러내는 장면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결코 잊을 수도 없는 과거. 결국 <히어 애프터>가 이야기하는 건, 전과자가 사회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치를 수밖에 없는 '비공식적인' 죗값에 대한 것이다.
메가폰을 잡은 매그너스 본 혼 감독은 스웨덴의 한적한 마을을 배경으로 푸르스름한 톤의 영상을 연출해 특유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완성했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오후를 연상시키는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 욘과 주변 인물들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부딪치는 장면들 또한 강렬하다. 여기에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 스웨덴 싱어송라이터 율리크 먼더의 공허한 눈빛과 깊은 감정 연기가 큰 울림을 준다. 특히 굳이 학교로 돌아온 이유를 묻는 말에 "혼자 있기 싫으니까"라고 답한 그의 한마디는 오래도록 귓가에 남는다. 오는 12일 개봉.
▲ 욘은 복역을 마친 뒤 마을에 돌아와 학교에도 복학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 (주)엣나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