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의 포스터. DC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보였던 고뇌가 마블에 전염이라도 된 것일까.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의 포스터. DC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보였던 고뇌가 마블에 전염이라도 된 것일까.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불과 한 달 전. 무소불위의 완력으로 인류와 지구를 악으로부터 지켜온 슈퍼맨과 배트맨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나는 누구이고, 내 힘은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 순정한 것일까'를 고민하더니, 그 자성의 태도가 세칭 '슈퍼영웅들'에게 전염된 모양이다. 이번엔 둘이 아닌 떼거리로 등장한 슈퍼영웅들이 집단적 자아성찰 모드에 돌입했다. 그 면면을 보자.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윈터 솔져, 팔콘, 워 머신, 호크 아이, 블랙 팬서, 앤트맨, 스칼렛 위치, 스파이더맨…. 일일이 호명해 부르기도 숨찰 정도로 많다.

무엇 때문일까? 개개인이 일기당천(一騎當千)하는 이들이 별반 '어울려 보이지 않는' 고뇌와 갈등에 빠진 이유는. 그 이유는 비교적 간명하다. "정의 실현의 출발점은 개인적 사명감인가, 집단을 지도하는 합리적인 규범인가"(지나치게 거창해서 숨 막히는 난제인 동시에 동양철학에 답을 묻는 질문 같다)를 놓고 패거리를 나눠 다툼을 벌인다는 것이 최근 개봉해 화제 속에 상영되고 있는 <캡틴 아메리가 : 시빌 워>의 기둥 줄거리다.

그렇다면, 앤소니와 조 루소 형제가 연출한 이 영화는 서양의 슈퍼영웅들이 봉착한 지극히 '동양적 자기성찰'의 문제해결 과정을 잘 표현해내고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동양철학적 문제제기, 서양식 문제해결

 영화는 '슈퍼영웅들의 집단난투극' 수준이다. 철학적 성찰은 빠진.

영화는 '슈퍼영웅들의 집단난투극' 수준이다. 철학적 성찰은 빠진.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쯤에서 다소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2500년 전 어느 볕 좋은 봄날. 호방한 성품의 '사마우'라는 젊은이가 중국 각처에서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유학자 공자를 찾아갔다. 가서는 단도직입 묻는다. "선생께서는 군자, 군자 하시는데 대체 군자가 뭡니까?" 어린 후학의 도발에도 공자는 화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친절하게 답을 들려줬다. "군자? 근심하거나 두려워함이 없음이 곧 군자니라."

위 이야기는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司馬牛 問君子 子曰 君子 不憂不懼'라는 대목에 다소 살을 붙이고, 드라마를 가미한 것이다. 왜 갑자기 공자고 <논어>냐고?

합리성 중심의 사고체계를 확립해온 서양과 윤리와 사상(思想)을 주요 축으로 인간품성을 교육해온 동양.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은 20시간이면 지구의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더 이상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유럽 사회에서 인도의 명상이 유행하고, 서양의 어떤 첨단시스템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이 동양에서 개발되기도 하는 오늘. 서양의 슈퍼영웅들이 동양의 군자지도(君子之道)를 궁금해 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이제 영화도 동서양을 구분하는 것이 무색해졌다. 제작된 공간에 상관없이 서양 영화가 동양철학적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고, 동양 영화 또한 서양식 합리성에 근거해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

공갈빵

 동양적 문제 제기를 해놓고, 지극히 서양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점을 찾아가는 허망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동양적 문제 제기를 해놓고, 지극히 서양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점을 찾아가는 허망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 영화는 딱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정의 실현의 출발점은 개인적 사명감인가, 집단을 지도하는 합리적인 규범인가를 놓고 벌이는 슈퍼영웅들의 집단난투극.' 문제 제기는 동양철학에 근거해 있음에도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의 문제 해결방식은 지극히 서양적이다. 그것도 그간 서양 영화의 정점에 서있던 할리우드식 돈잔치라는 방식.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부은 컴퓨터그래픽을 배경으로 치고받고, 광선과 미사일을 쏘아대고, 초강력합금으로 만들어진 손으로 서로의 목을 졸라대는 슈퍼영웅들. 이 영화 어디에도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철학적 성찰은 없다. 해서 알맹이가 빠진 공갈빵 같다.

영화가 개봉될 즈음. 홍보사는 "마블의 진화를 확인하라!" "역대 최다 슈퍼히어로 등장!" "드디어 공개되는 역사적인 대결!" 따위의 장황한 광고 문구를 써가며 관객을 유혹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는 과장된 선전 문구와는 달리 보는 이를 허망하게 만든다. 아무런 메시지도 읽히지 않는 이 영화를 12세 아니, 조금 더 높이자, 15세 이상은 피해가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공자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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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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