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휴먼다큐 - 사랑>

MBC <휴먼다큐 - 사랑> 엄앵란과 신성일은 다시 재결합을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할까? ⓒ MBC


엄앵란과 신성일은 1960년대 대표적 청춘스타다. 1960년대의 청춘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은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에서처럼 사랑했고,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복받는 결혼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을 맺지 못했다. 스타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혹은 무색하게 전 국민이 두 사람의 별거와 그에 이르기까지의 속내를 잘 알 수 있도록 가십성 기사를 양산해 냈다.

황혼 이혼이 낯설지 않은 세상, 두 사람의 뒤늦은 해후

 MBC <휴먼다큐 - 사랑>

황혼 이혼이 낯설지 않은 세상에서 이 둘의 재결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MBC


'황혼 이혼'이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다른 말로 '백년해로'가 미덕이 아닌 세상이 됐다는 뜻이고,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던 '가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빈발하고 있다. 나이 들어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서로의 늙은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이 미덕이 아닌 세상에, <2016 휴먼 다큐 - 사랑>은 40년을 별거한 엄앵란·신성일 부부의 결합 이야기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도대체 40여 년을 따로 살아왔던 이 부부가 이즈음에 굳이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아내 엄앵란의 건강상의 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채널A <나는 몸신(神)이다>에서 진행된 건강 검진에서 유방암 검사를 받은 엄앵란은 수술을 받게 된다. 건강하게 가정을 지탱해 왔던 아내의 뜻하지 않은 암 통보는 바깥으로 나돌았던 남편 신성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에 남편은 여생을 아내 곁에서 아내를 돌보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하지만 '방탕한 남편의 귀의'라는 미담으로 단순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남편의 의지는 뜻밖에도 "인제 와서 무슨!"이라는 아내의 벽에 봉착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서로 떨어져 산 지 40여 년, 바람에 정치에 영화를 한답시고 투자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란 수식어가 무색하게 신성일의 아내로 살아온 시간은 배우 엄앵란에게 가정을 이끌고 가야만 했던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것도 남편은 책임지지 않는. 비록 아직도 두 딸과 아들의 아버지로서 호적상 갈라서지 않고, 시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있지만, 부부로서의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거기에 스타일마저 다른 남편과 너무 오래 떨어져 산 엄앵란은 남편의 제안 자체가 부담스럽다. 그런 남편의 제안에 맞춰 두 사람의 결합을 유도하는 방송조차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제작진과 신성일은 꾸준히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한다. 신성일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하고, 며칠에 한 번 아픈 아내를 위해 보양식을 싸 들고 찾아오고, 다리가 불편한 아내를 위해 장모님을 모신 절에 동행한다. 결국, 이런 남편과 제작진의 지극한 성의에, 아내 엄앵란은 지난 시간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 늙어가는 자신에 여전히 '기둥'이었음을 받아들이고, 의지할 의향을 보이며 방송은 마무리된다.

'사랑'을 빙자한 노년의 판타지

 MBC <휴먼다큐 - 사랑>

MBC <휴먼다큐 - 사랑>의 엄앵란은 암 투병 이후에도 여전히 방송에서 활동 중이다. ⓒ MBC


이날 방송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호사다마했던 신성일의 인생보다 책임지지 않는 남편 대신 가장이 되어 한 가정을 이끌어 왔던 전통적인 어머니 엄앵란의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엄앵란은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방송 활동 중이다. 심지어 유방암 수술을 하고서도 완쾌되지 않은 노구를 이끌고 방송 출연을 재개한다. 여전히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기는커녕, 집에서 돈을 버는 유일한 사람이 그녀라는 이유로 마음 편히 쉴 틈이 없다. 심지어 자신이 죽고 난 뒤 자식들과 남편이 거지가 되지 않게 하려고 죽는 날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라 했지만, 우리에게 엄앵란은 방송 패널로 나온 후덕한 어른의 모습으로 익숙하다. 하지만 후덕한 외모와 달리, 그녀의 입을 통해서는 젊은 세대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주입'하다시피 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주로 종편 토크쇼를 통해 활약하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엄앵란의 이야기는 그녀가 여자임에도 여자의 편에 서기보다는 가장과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당연시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인 엄앵란의 모습은 그녀가 방송을 통해 풀어냈던 이야기들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남편이 내버린 가정을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책임지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다시 방송에 서야 하는 노년의 가장. 여전히 그녀가 지켜내야 하는 가정, 심지어 그녀가 죽고 재혼을 할지도 모를 남편이 그녀를 지배한다. 숙명여대를 다니던 재원으로 대중들에게 인텔리로 사랑을 받던 여배우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 세대의 여성이 됐다.

여전히 재정적으로 가정을 책임지더라도 그녀에게 자유가 있다면 남편과 함께 살지 않을 자유뿐이었다. 바람 잘 날 없는 남편과의 별거 이후, 남편은 아프게 되었다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맞게 편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과연 돌아온 탕아처럼 결초보은의 자세로 마음을 바꾼 남편과 40여 년 만에 한집에 살아야 할까?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남편을 '기둥'으로 여기는 전통적인 아내 엄앵란의 정서를 강조하며 이 부부의 결합을 '사랑'이라며 구색을 갖춰보지만, '황혼 이혼'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 사람들 눈에는 40여 년을 떨어져 산 낯선 이들의 어색한 동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MBC <휴먼다큐 - 사랑>

MBC <휴먼다큐 - 사랑>의 제작진은 신성일과 40여 년을 떨어져 살게 된 엄앵란에게 가족과 부부의 판타지를 강요한다. ⓒ MBC


물론 부부의 가정사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 사연에는 개별성의 깊이가 있겠지만 40여 년을 바람처럼 스치듯 살고, 자식과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남편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의 곁을 지켜봐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기둥'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편의 결초보은은 꼭 이혼한 딸과 손주들과 또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아내의 집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픈 아내에게 결국 은수저를 찾게 하는 남편의 고집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별거 이후에도 행복한 부부상을 연출했던 두 사람의 지난날처럼, 이미 허상이 되어 가는 '가족'과 부부'의 판타지를 강요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한 집, 한 방, 그리고 한 침대를 나누어야 부부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양반가에서는 부부가 담을 나누어 서로 다른 공간에 살아야 했던 것이 법도였다. 별거 40여 년의 부부를 굳이 한집에 살도록 하면서 '사랑'의 미덕을 그리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그 다큐멘터리에게 2016년의 '사랑'이란 대체 뭔지 회의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휴먼 다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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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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