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자축하는 레스터 시티 트위터 갈무리.

창단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자축하는 레스터 시티 트위터 갈무리. ⓒ 레스터 시티


[기사 보강 : 3일 낮 12시 18분]

모두가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반짝 돌풍이라고 비웃었던 레스터 시티가 기어코 영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레스터 시티는 2위 토트넘이 3일(한국시각) 첼시와의 경기에서 2-2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승점 7점의 격차를 유지, 남은 2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창단 132년 만에 기적 같은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영국 언론은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확정되자 긴급 속보로 대서특필했고, 유럽 축구가 별로 인기 없는 미국에서도 레스터 시티의 우승은 엄청난 화제로 떠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축구 역사상 가장 놀라운(remarkable) 우승"이라고 치켜세웠다.

 지난 5월 1일 맨유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레스터 시티.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비기면서, 레스터 시티는 1884년 구단 창단 이래 132년 만에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지난 5월 1일 맨유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레스터 시티.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비기면서, 레스터 시티는 1884년 구단 창단 이래 132년 만에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 연합뉴스


1884년 창단한 레스터 시티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3부 리그에서 허덕이던 무명 구단이었다. 2부 리그를 거쳐 2013~2014 시즌 마침내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레스터 시티는 지난 시즌 강등권에서 머물다가, 14위(11승 8무 19패)를 기록하며 겨우 2부 리그 추락을 피했다.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기적으로 불리는 이유는 숫자가 잘 말해준다. 영국의 최대 스포츠 베팅업체 '윌리엄힐'은 시즌 개막 전 레스터 시티의 우승 배당률을 5000대 1로 내걸었다. 1만 원을 걸고 만약 레스터 시티가 우승하면 무려 5천만 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 돈을 건 사람은 12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도박사들은 미국 인기 여배우 킴 카다시안이 미국 대통령이 될 확률을 2000대 1,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을 확률이 2000대 1, 네스호의 괴물이 발견될 확률이 500대 1이라고 전망했다. 이를 보면, 이번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류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BBC 방송과 <가디언>은 올 시즌 레스터 시티가 2부 리그로 강등될 것이라고 혹평했다. <스카이스포츠>가 지난 시즌과 같은 14위로 전망한 것이 그나마 호의적이었다. 축구팬들이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왕위 '등극'이 아닌 '찬탈'로 부르는 이유다.

'5000대 1' 확률을 살린 라니에리의 지도력

 사령탑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활약을 소개하는 레스터 시티 트위터 갈무리.

사령탑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활약을 소개하는 레스터 시티 트위터 갈무리. ⓒ 레스터 시티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기만 해도 행복한 레스터 시티로서 우승은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였다. 더구나 지난해 여름 일부 선수들이 동남아에서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이 일었고, 결국 나이젤 피어슨 감독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최악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전화위복'이 되었다. 당장 사령탑부터 구해야 했던 레스터 시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을 영입했다. 이탈리아 피오렌티나, 스페인 발렌시아, 영국 첼시 등 다양한 팀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그 역시 우승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감독이었다. 누구도 라니에리 감독의 레스터 시티행을 주목하지 않았다.

레스터 시티 팬들도 라니에리 감독을 반기지 않았다.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피어슨 감독이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하지만 엉망진창이 된 팀을 하루빨리 수습해야 했던 레스터 시티는 경험이 풍부한 라니에리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고,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비시즌 동안 팀 훈련을 지휘할 여유도 없이 다급하게 부임한 라니에리 감독도 프리미어리그 잔류를 목표로 내세웠다. 레스터 시티는 약체팀들이 즐겨 쓰는 '강력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 전술로 개막 2연승을 거뒀다.

당시만 해도 레스터 시티의 돌풍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전체 시즌 일정의 절반인 19경기를 치를 때까지 단 2패만 당했고, 그제야 모두가 레스터 시티를 우승 후보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레스터 시티 우승의 가장 큰 공은 라니에리 감독의 몫이라는 것에 물음표를 다는 사람은 없다. 64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명장' 반열에 오른 그는 조국 이탈리아 대표팀 사령탑 후보로도 거론되며 30년 감독 경력의 결실을 만끽하고 있다.

축구장의 '흙수저'들, 레스터 시티에서 '용'됐다

 간판 공격수 제이미 바디를 소개하는 레스터 시티 트위터 갈무리.

간판 공격수 제이미 바디를 소개하는 레스터 시티 트위터 갈무리. ⓒ 레스터 시티


라니에리 감독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는 하나는 무명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 최고의 조화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그 한가운데 레스터 시티의 간판 공격수 제이미 바디(영국)가 우뚝 서 있다.

2007년 아마추어 8부 리그에서 데뷔한 바디는 축구판의 '흙수저'였다. 프로 구단(4부 리그 이상)에 가지 못해 낮에는 의료기구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 햄버거로 끼니를 때운 뒤 축구장으로 달려갔다. 고단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생활이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실력을 쌓은 바디는 2012년 2부 리그였던 레스터 시티에 입단하며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했다. 이때 그의 이적료는 12억 원에 불과했다. 요즘 K리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러나 단거리 육상선수로 뛰어도 성공할 것 같은 폭발적인 스피드와 탁월한 골 결정력을 뽐내며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올려놓았다.

바디의 활약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이어졌다. 올 시즌 11경기 연속 골을 터뜨리며 최다 연속골 신기록을 세웠고, 현재까지 22골을 기록하며 토트넘의 해리 케인(24골), 맨체스터 시티의 세르히오 아구에로(23골)와 함께 득점왕 경쟁을 펼치고 있다. 데뷔 당시 주급 5만 원을 받던 그는 이제 세계적인 명문 구단들이 수백억 원의 이적료를 제시하는  '용'으로 거듭났다.

리야드 마레즈(알제리)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화려한 드리블과 정확한 패스로 상대 수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올 시즌 18골과 11도움을 기록한 '재주꾼'이다. 바디와 함께 레스터 시티를 우승으로 이끈 마레즈는 중동을 대표하는 축구스타로 불리며 명문 구단들의 구애를 받고 있다.

오카자키 신지(일본)는 바디나 마레즈보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중요할 때마다 '한 방'을 터뜨린 선수다. 독일 무대를 전전하다가 올 시즌 레스터 시티에 입단한 그는 같은 시기 40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토트넘에 입단한 손흥민에게 가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시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강철 같은 체력과 재치있는 패스를 뽐내는 마크 알브라이튼(영국), '전설적인 골키퍼'였던 피터 슈마이켈의 아들이라는 후광에서 벗어나 레스터 시티의 주전 골키퍼로 자리 잡은 카스퍼 슈마이켈(덴마크) 등 불과 1년 전만 해도 평범했던 선수들이 레스터 시티의 기적을 일궈냈다.

레스터 시티, 그들의 우승이 박수받는 이유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박수받는 이유는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설명하기 부족하다. 종목을 불문하고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프로 스포츠에서 이 같은 기적을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프리미어리그는 축구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구단 소유권을 가장 먼저 외국 자본에 개방했다. 중동, 러시아, 아시아의 거부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구단을 인수하고 전 세계 스타 선수들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유럽에서 우승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 프리미어리그다.

물론 일각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 아스널, 첼시 등 기존의 강호들이 올 시즌 유독 부진한 탓에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가능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겸손한 라니에리 감독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며, 가장 철저히 준비한 레스터 시티였기에 기회를 살린 것이다.

평범한 노장 감독과 무명의 선수들의 헌신과 용기로 쟁쟁한 부자 구단들의 콧대를 꺾은 레스터 시티의 우승은 '축구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일깨웠다.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진리이지만, 아직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축구 팬들을 열광케했다.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확정되자 내년 시즌에도 돌풍을 이어갈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구단 재정을 위해 일부 주축 선수를 팔 수도 있고, 챔피언스리그까지 치러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인 부담이 훨씬 커진다. 정상은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누구도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예상하지 못했듯 미래의 일은 전혀 알 수 없다. 지금처럼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일 수도 있다. 과연 레스터 시티는 왕위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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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시티 프리미어리그 제이미 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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