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메인포스터.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메인포스터. ⓒ 민병훈필름


한국 영화산업의 배급 구조에 관해 "미쳤지만 같이 미칠 수 없다"며 저항을 모색해왔던 민병훈 감독이 결국 전혀 새로운 배급 방식을 선언했다. 오는 5월 12일부터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개봉하는 신작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이하 <평정지에>)를 통해서다. 배급사 인디플러그와 제작사 민병훈 필름이 힘을 뭉친 새로운 배급 방식의 요체는 이러하다.

1. 신청형 극장 상영 + GV (관객과의 대화)
2. 크라우드 펀딩형 극장대관 상영 + GV
3. 직거래형 대안공간 공동체 상영 + GV
4. 파일전송상영 + 뒷풀이

민병훈 감독은 26일 오후 '문학의 집 서울'에서 열린 언론시사에서 <평정지에>를 '갤러리 필름'이라 명명했다. 작품 내용이나 상영 형식 모두 미술관에서 큐레이터와 함께 영화(와 미술)를 관람하고 설명을 듣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겠다는 의도다. 이를 위해서 기존 찾아가는 '공동체 상영'에 더해 "5명이 됐든 20명이 됐든" <평정지에>를 보고자하는 관객들에게는 "직거래 방식"도 마다 않겠다는 것이다.

이날 극장이 아닌 공간에서 영화의 주연배우이자 세계적인 중국인 아티스트 평정지에와 함께 영화를 공개한 것 역시 "대안적인 공간에서 '촉감적'으로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민 감독은 "독창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 단 한 명이라도 원한다면 이런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며 '6개월간의 대장정'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그렇다면, 그가 "한국영화 시장에서 이런 영화를 내놓는 건 자살행위와도 같다"고 말하는 <평정지에>는 어떤 영화일까.

'평정지에'가 직접 연기한 예술가의 내면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한 장면. 자신의 작품 앞에서 연기 중인 평정지에.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한 장면. 자신의 작품 앞에서 연기 중인 평정지에. ⓒ 민병훈필름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한 장면. 배우 윤주.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한 장면. 배우 윤주. ⓒ 민병훈필름


스카프를 얼굴에 감싸매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타인. 평정지에가 그를 향해 다가선다. 스카프를 걷어내자 아름다운 여인(윤주 분)이 앉아있다. 아니, 화면의 전환과 함께 어느새 그 여인은 평정지에 자신으로 바뀌어 있다. 바뀐 것인지 원래 평정지에였는지 알 길은 없다. 여기에 청년(서장원 분)까지 같은 앵글안에 같은 구도로 등장시켜 혼란스러움을 더한다.

그리고 이 '갤러리 필름'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 단서를 줄만한 다른 장면. 거리를 걷던 평정지에는 계속해서 자신을 마주치는 여인에게 자꾸만 눈길을 준다. 두 번, 세 번…. 결국 네 번째에 평정지에는 뒤돌아 여인을 따라 나선다. 누구일까,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저 여인은.

<평정지에>는 유독 인물들이 누군가를 찾는 듯, 혹은 대상은 관계없다는 듯 거닐고 응시하고 헤매는 장면들이 많다. 그것이 바로 평정지에로 대변되는 예술가의 내면, 즉 형체 없는 예술적 영감을 찾고 헤매고 발견하고 단련하는 것이 예술가의 창작의 원천이라는 듯 말이다. 이를 위해 민병훈 감독은 한 장면 한 장면을 떼어놓고 봐도 하나의 완성된 예술적 시퀀스로 기능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나 구도, 배우들의 비지시적인 연기는 그 자체로 관객들의 감흥과 심상을 자극할 만하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화면을 분할하여 두 남녀를 구도화하고 비스듬히 겹치게 만드는 형식적 기교는 친절해 보일 정도다. 초반부엔 여인을 대상화시켰지만, 결국 '내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영감'과 '나를 바라볼지 모르는 그 대상', 그리고 '제3자화시킨 나'의 합일이란 주제적 측면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정지에가 여인에게 "내가 왜 이런지 속마음을 모르겠어?"라며 "답을 해 달라"고, "날 멀리만 하지 말아줘"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평정지에>의 주제를 대변하는 친절한 장면이기도 하다. 형체 없는 그 내면의 영감들에 중독된 것처럼 매달려야 하는 예술가들의 심리를 꽤나 귀엽고도 절절하게 형상화해냈기에. 또 이를 직접 중국어 대사로 연기한 것이 아티스트 평정지에 아니겠는가.

민병훈 감독의 도전은 현재진행형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에 대해 설명 중인 민병훈 감독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에 대해 설명 중인 민병훈 감독 ⓒ 민병훈필름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순위에 꼽히는 인물이다. 세계미술을 중국이 리드하고 있는데, 평정지에야말로 차세대 리더로 꼽히고 있다. 미술사적으로나 미술 시장에서 공히 위상이 굉장히 높고 개인적인 색깔 역시 독창적이라 정평이 나 있다. 색채나 여성성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지만, 중국 현대인의 감정을 잘 녹여놓은 서정시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날 함께 자리한 한국미술경영연구소 김윤섭 소장은 '중국 여인 초상'로 유명한 작가 평정지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미술인들과 애호가들로부터 중국현대미술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그 평정지에가 직접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평정지에>는 예술적인 각광을 받기에 충분한 작품이기도 하다. 심지어 준수한 수준의 연기를 선보인 평정지에는 민병훈 감독과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처음부터 주제는 알고 있었지만, 민 감독이 어떻게 펼쳐낼지는 잘 몰랐다. 영화를 보고, 촬영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감독의 의도를 다시 이해하게 됐다.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풍부한 영화다. 원래 영화가 배우의 노력은 눈에 잘 보이지만 (스크린 밖) 감독의 노력은 잘 안 보이지 않나.

영감이란 것도 그렇다. 미인처럼 길거리에서 매일 만날 수도 있지만, 그 영감이 의미가 있는지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게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그 영감을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제일 힘든 일이다. 그렇게 예술은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인 거 같다. 우리네 인생처럼."

엇비슷한 맥락에서, <평정지에>의 관람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민병훈 감독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민 감독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일이 통쾌하거나 극히 재밌거나 하지는 않지 않나"라고 반문한다. 그만큼 관객들이 <평정지에>와 같은 예술영화를 관람함으로서 멀티플렉스에서 쉽게 만나는 대중영화와 달리 어떤 지적 유희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민병훈 감독은 단편영화 <감각의 경로>(김남표), <페르소나>(마리킴) 등을 통해 '예술가 시리즈'를 작업해왔다. 차기작 역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주인공인 <황제>다. 극과 다큐가 섞인 <평정지에>는 내면과 외면, 예술과 자본, 청색과 홍색 등 끊임없이 경계를 모색해온 평정지에의 작품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평정지에라는 거장과의 작업과 함께 대안적인 배급 방식까지 모색중인 민병훈 감독. 그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왼쪽부터) 민병훈 감독, 평정지에, 윤주, 서장원.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의 (왼쪽부터) 민병훈 감독, 평정지에, 윤주, 서장원. ⓒ 민병훈필름



민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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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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